2021-06-24
<농상집요> 제1권 본문 중 일부
<농상집요(農桑輯要)>는 중국 원나라 때 사농사(司農司, 농사 담당기관)가 편찬한 농업 과학 저작이다. 1273년에 책으로 만들어져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관찬 농서다. 전체 7권으로 중국 원나라 이전 농서에 기재된 농경 기술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연구했다. 특히 농업의 정경세작(精耕細作)과 재상양잠(栽桑養蠶) 기술을 강조했고, 목화와 모시 등 경제작물 재배 기술을 중시해 실용성이 매우 강하다. 이런 이유로 원나라 때 <농상집요>는 여러 차례 재간됐고, 명나라와 청나라 때 <영락대전(永樂大典)>과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각각 수록됐다.
그런데 <농상집요>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농상집요>가 고대 조선반도(한반도) 농업 발전에도 적잖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고려 말 문신 이색은 1349년 원나라로 가 3년 동안 유학을 했다. 그는 유가 경전 외에 <농상집요>를 읽고 고려로 가지고 갔다. 고려 사신 문익점도 <농상집요>를 통해 목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원나라에서 목화 씨를 가지고 와 책에 기술된 대로 목화를 심어 조선반도에 면방직 기술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에 이르자 통치자는 <농상집요>를 매우 중시했다. 태종 시기 대신 한상덕은 <농상집요>가 백성에게 매우 유익하지만 고아한 한문(漢文)으로 되어 있어 자국의 언어인 이두로 번역해 백성들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자고 건의했고 태종은 이를 흔쾌히 윤허했다. 한상덕은 또한 <농상집요> 중 양잠 부분을 베끼고 정리한 것에 이두 문자로 설명을 더해 조선반도 역사상 최초의 양잠 관련 서적인 <양잠경험촬요(養蠶經驗撮要)>를 편찬했다. 이후 태종은 조선 각지에 양잠을 적극 장려하고 규정을 반포해 양잠하는 평민과 노비에게 잡역을 면해주었고 후궁에게 친히 양잠을 하여 모범을 보이라고 명했다.
세종은 각 도에 농사를 지을 때 <농상집요>와 <사시찬요(四時纂要)> 등 농업 경전을 참고하라고 명했다. 당시 조선반도는 기본적으로 봄갈이를 하고 가을갈이는 적었기 때문에 1437년 세종은 각 지방 관리에게 <농상집요>에 기록된 ‘가을 갈이’ 기술을 적극 보급하라고 명했다. 이 밖에 세종은 <농상집요>를 통해 농작물 병해충 방지 및 식물 자체의 특징을 이해했고 이런 경험을 일반 백성에게 보급하라고 명했다.
세조는 백성들이 약용 작물인 홍화를 심을 때 봄 파종법만 알고 중국에서는 봄, 여름에 파종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을 발견했다. 때문에 세조는 각도 관찰사에게 <농상집요> 중 홍화 재배법, 특히 봄, 여름 파종법을 조속히 민간에 전파하도록 명했다.
이로써 <농상집요>는 중국과 한국의 고대 경제, 과학기술, 문화 교류의 상징일 뿐 아니라 고대 조선반도의 일반 백성에게 많은 이익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방과 교류의 좋은 점이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고 수익자는 수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주었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