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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빛의 세계, 한국 영화를 말하다


2020-09-18      글| 쑹샤오첸(宋筱茜)

이번 여름, 오랫동안 관객을 만나지 못했던 중국의 극장이 다시 개장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많은 이들은 빛의 세계가 주는 아름답고 즐거운 기분을 다시 느끼기 위해 발 빠르게 영화표 예매에 나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한국의 극장은 전면 휴업은 하지 않았지만 예년보다 관객수가 크게 줄었다. 코로나19 상황이 완화되면서 극장 내 음식 섭취, 두 사람 이상 붙어 앉기 금지 등 규정은 여전하지만 한국 영화 박스오피스는 여름방학을 맞아 작은 절정기를 맞았다. 8월 중순 기준 예매율 1-3위를 모두 한국의 신작영화가 차지함으로써 한국 영화에 대한 관객의 사랑과 성원을 알 수 있었다.
 
1919년 서울 종로의 단성사에서 김도산이 필름으로 연쇄극 연출 실황을 기록했다. 이렇게 탄생한 <의리적 구토>는 한국 최초의 영화가 됐다. 1923년 윤백남이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세>를 연출했고, 그의 동료 나운규는 1936년 한국 영화사에 큰 영향을 준 <아리랑>을 만들어 발 딛고 선 토지와 인간의 감정에 바탕을 둔 한국 민족 영화의 탄생을 알렸다.
 
1930년대 한국 영화는 무성시대에서 유성시대로 진입해 짧은 전성기를 맞은 뒤 제2차 세계대전 후반 일본 식민당국의 통제로 침체에 빠졌다. 2차대전 이후 영화산업은 채 회복되기도 전에 한국전쟁의 영향으로 침체됐다. 1950년대 중반 새로운 한국 영화사와 감독이 등장했고, 6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영화산업은 활기를 띄게 됐다. 유현목, 신상옥 등 거장도 이 시기에 중요한 작품을 창작했다. 위로는 <아리랑>의 민족 전통을 잇고, 아래로는 세기 너머의 ‘한류’를 바라보면서 진실한 감정과 섬세한 터치로 한국 영화의 독특한 맛을 이었다.
 
70-80년대 한국 경제가 빠르게 발전하면서 외국의 문화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청소년들이 서로를 ‘장만옥’ ‘왕조현’으로 부르는 것은 당시 문화 시장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1998년 영화 심의제가 등급제로 바뀌면서 한국 영화의 독창성이 폭발했다.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이후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감독들이 모두 세기가 교차하는 이 시기에 한국 영화의 화려한 변신에 진한 발자취를 남겼다.
 
몇 년 전 필자는 서울에서 우연히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The Avengers: Age of Ultron)> 촬영지를 방문했다. 동행한 한국인 친구는 한국의 이미지가 마블에 등장한다고 무작정 낙관하지 않았고 영화 속 국가 브랜드의 광고 효과를 지적했다. 2020년 <기생충>이 오스카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는 한국 영화가 전환의 20년 동안 다원화, 국제화, 산업화의 길을 성공적으로 걸어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재 필자의 한국인 친구 중에는 넷플릭스를 위해 촬영하고 영화 스트리밍 미디어 시대에 발맞추는 사람이 있다. 반면 서울 경희궁 인디 스페이스 극장을 지키며 독립영화 창작과 보급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SIWFF)의 장소 섭외를 위해 밤낮으로 분주한 사람도 있다. 이런 노력과 시도, 레드 카펫과 함께 보다 혁신, 포용, 자신, 근면, 무한한 가능성인 한국 영화의 현실을 만들었다. 한국 영화의 성공 경험이 보다 많은 사람을 깨닫게 하고 생각하게 하며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는다. 
 
 

글| 쑹샤오첸(宋筱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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