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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우석(劉禹錫)─추사(秋詞)


2019-10-15      


自古逢秋悲寂寥, 我言秋日勝春朝。 
晴空一鶴排雲上, 便引詩情到碧霄。
Zìgǔ féngqiū bēijìliáo, wǒyán qiūrìshèng chūnzhāo. 
Qíngkōng yíhè páiyúnshàng, biànyǐn shīqíng dàobìxiāo.
자고봉추비적료, 아언추일승춘조. 
청공일학배운상, 편인시정도벽소.

예로부터 가을 되면 쓸쓸하다는데, 
나는야 가을날이 봄 새벽보다 좋다네.
맑은 하늘 구름 위를 날아가는 한 마리 鶴, 
내 시심도 날아올라 저 푸른 하늘.

연작시 <추사(가을의 노래)> 2수 가운데 첫 수, 가을의 시정을 읊은 걸작의 하나다. 이상과 분투의 뜨거운 영웅적 파토스(열정), 고상한 선비적 에토스(이성)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입에 ‘착 붙고’ 뇌리에 ‘딱 꽂히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암송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이 칠언절구는 지난 천 수백 년간 사랑받으며 서예의 제재 또는 문인화의 화제(畵題)로 널리 쓰인 덕분에 한자문화권 어디서든 액자나 족자 등으로 접하기 쉽다. 낯선 곳에서 아는 詩를 만난다는 것은 타향에서 우연히 옛 친구나 고향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운 체험이다. 전문가 아니면 알아보기 힘든 서체로 쓰여 있을지라도, 아는 詩는 알아보기 쉽고 알아본 기쁨 또한 배가되곤 한다.

우리말 중세어나 현대 문어체 가운데 고전 중국어에서 들어온 어휘들이 꽤 있다. 제1구의 “自古”는 어미를 붙여 ‘자고로’가 되었고, “寂寥”는 ‘적요(적적하고 쓸쓸하다)’의 어원으로 볼 수 있다. 제2구의 “秋日(가을날=가을 한낮)”과 “春朝(봄날 새벽)”의 대비는 눈길을 끄는 성공적 기교다.  “春朝”의 ‘朝’가 압운(押韻, rhyme)을 위한 선택인 동시에 의미적으로도 멋진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봄날 새벽(春朝)’은 한자문화권의 보편 감성을 돋우는 시어이자, 농민은 농민대로 선비는 선비대로 설레는 시공이다. 그런데 그런 봄 새벽보다 가을이 더 좋다니 얼마나 특별한가!

겨울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봄의 감흥은 각별하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그러하리라. 당시(唐詩) 4만8900여 수를 수록한 <전당시>만 봐도 가장 많이 등장한 계절이 ‘봄’이다. 반면, 가을은 풍요로운 결실과 수확의 시기가 짧게 지나가면 빠르게 조락의 계절로 이동한다. 예로부터 가을노래에는 고독과 비애가 묻어나기 마련이고, “가을이 더 좋다”는 시인의 발상은 그래서 한층 참신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내친 김에 <추사> 제2수도 한번 봐 두자. 유명세는 제1수지만 제2수 또한 놓치기 아깝다. “산 좋고 물 맑은데 밤 되면 서리까지 내려, 몇몇 나무들 붉은 빛 더한 잎새가 연노란 단풍 속에 돋보이네. 누각에 올라보니 뼛속에 스미는 맑은 가을 기운, 어찌 봄날처럼 미친듯 나댈 수 있으리(山明水淨夜來霜, 數樹深紅出淺黃。試上高樓淸入骨, 豈如春色嗾人狂)。”

유우석(772-842)의 字는 몽득(夢得), 훗날 태자를 가르치는 ‘태자빈객’을 지내 ‘劉賓客’으로도 불린다(흔히 본명=관명을 놔두고 평소 이름인 字, 나이 들면서 號 또는 당호를 가지는데 그는 이례적으로 號가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다). 하남(河南)성 낙양(洛陽) 태생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 말로는 중산(中山, 지금의 하북성 定州) 사람이며 선조가 북방 출신이다. 793년 진사에, 5년 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한다. 지방관의 막료로 시작해 중앙과 지방의 몇몇 관직을 거치는데, 환관과 지방 번진의 할거세력에 대항해 개혁을 기도하다가 좌천되어 고초를 겪는 등 순조롭지 않은 생애였다. 명시 <江雪>의 시인 유종원(柳宗元, 773-819)과는 과거급제 동기생인 이래, 평생 동지이자 문우로 지냈다.

<추사> 2수는 개혁 노력이 저항에 부딪혀 낭주(朗州)로 밀려났던 시절(34살)의 작품이다. 10년 후 다시 중앙으로 복귀했으나 그때 지은 詩가 물의를 빚어 다시 좌천된다. 이렇게 지방 몇 군데를 전전한 끝에 귀환, 태자빈객 등을 역임하고 71세로 병사한다. 유우석은 만년에 교유한 백거이(白居易, 772-846)에게 ‘시호(詩豪)’라 불렸다. 유종원과 나란히 ‘劉柳’로, 백거이와 더불어 ‘劉白’으로 칭해진다.

유우석 詩세계 전반의 주요 특징은 민요풍의 소박함이다. 남쪽 변방(南蠻)의 풍토를 주제로 한 것도 많아 이채를 띤다. 첫 직장이 지방이었고 좌천으로 여러 곳을 전전한 역정 덕분일 것이다. 현지 농민의 삶과 감정을 노래한 작품, 예를 들어 <죽지사(竹枝詞)> <유지사(柳枝詞)> <삽전가(揷田歌)> 같은 것들을 남겼다. <劉夢得文集> 30권, <外集> 10권이 전한다. 총 407수의 詩를 남겼는데 그 3분의 2가 5언시다.

끝으로, 詩는 아니지만 유우석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명문 <누실명(陋室銘)>이 있다. ‘누추한 집을 기념하는 글’을 의미하는 이 글의 전반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山不在高,有仙則名。水不在深,有龍則靈。斯是陋室,惟吾德馨(산은 높아서가 아니라 신선이 살아야 명산이요. 물이 깊다고해서 신령한 것이 아니라 용이 살고 있어야 신령한 물이다. 누추한 이 방도 오직 내 덕으로 향기롭네)” 그야말로 서재나 거실에 걸어 두고픈 멋진 문구, 과연 오래오래 사랑받아온 천하명구다.


글ㅣ 임명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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