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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문인 마음 속의 ‘산하이관’


2019-10-15      



산하이관(山海關, 산해관)은 명나라 창청(長城) 동쪽의 중요한 요충지 중 하나로 중국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에서 북동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민간에서는 이를 창청 동쪽의 첫 번째 관문이라고 불러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고 한다. 산하이관은 중원으로 향하는 요충지로 중국 동북과 화북 지역의 경계로 ‘변경의 목구멍, 수도의 보호자’라고 불리며 옛부터 병가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산하이관은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를 방문하려는 조선왕조 사신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으로, 조선 사신과 문인은 산하이관의 모습을 직접 보고 역사의 흥망과 애국심을 시문의 형태로 표현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 정인지는 “중국에는 쥐융관(居庸關)과 산하이관이 있고, 모두 위(衛, 명나라때 군사가 주둔하던 거점) 안에 있다. 중요한 지역을 지키니 성인(聖人)의 방법이다”라고 했다. 그는 산하이관의 위치와 견고함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이는 조선왕조가 중국에서의 더 나아가 동북아지역에서의 산하이관의 전략적 위치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을 뜻한다. 1610년 조선 사신 정사신은 산하이관을 지나며 이 일대의 건축과 공사가 매우 완벽하고, 규정도 엄격하며, 진출입하는 백성들의 질서도 정연한 것을 발견했다. 산하이관 성루 앞에 선 그는 험준한 지리적 위치와 요충지의 웅장한 모습에 전율해 ‘만리성두제일관, 삼한행객종기관(萬里城頭第一關, 三韓行客縱奇觀)’이라고 시문을 남겼다. 이는 만리장성의 첫 번째 관문은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온 여행객에게 기이한 풍경이라는 뜻이다. 그는 “산하이관은 당시 발전하기 시작한 여진족을 중원 밖에 막을 수 있다”며 “산하이관은 명나라 황조의 웅장한 기세를 보여줘 북방 이민족이 산하이관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놀라 간담이 서늘해진다”라고 말했다. 명나라로 가던 조선 사신들은 산하이관을 보면 약속이나 한듯이 견고한 변방의 관문이고, 위대한 공정이라고 표현했다. 예를 들어 조선의 문신 이연귀는 <산해관기사(山海關記事)>에서 ‘만부불감전, 일부불감환(萬夫不敢前, 一夫不敢逭)’이라며 산하이관의 방어 기능을 매우 칭찬했다. 이 말은 적군 만명이 와도 공격할 수 없지만, 우리 편은 한 명이 지켜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은 없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후 청나라 군대가 산하이관을 뚫고 중원으로 들어가자 산하이관에 대한 기존의 인식도 깨졌다. 산하이관은 조선 사신과 문인들이 역사의 흥망을 한탄하는 데 사용하는 대명사가 돼 처량하고 비장한 정서가 시문에 많이 나타났다. 조선 사신 홍명하는 ‘석문산해장, 금일견황량(昔聞山海壯, 今日見荒涼)’이라고 탄식했다. 과거 산하이관은 웅장하다고 들었는데 지금 직접 보니 황량하다는 뜻이다. 조선 사신 김해일은 ‘산하미세연진색, 성곽유존전벌흔. 지유당년동해수, 조종의구공관문(山河未洗煙塵色, 城郭猶存戰伐痕. 只有當年東海水, 朝宗依舊拱關門)’이라고 표현했다. 산하에는 전쟁의 초연이 여전하고 산하이관의 성벽에는 전쟁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은 동쪽의 해수만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산하이관의 관문에 조아린다는 뜻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선 사신과 문인은 산하이관의 견고함 여부가 중원 왕조의 흥망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아니라 정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887년 산하이관을 방문한 조선 문인 이승오는 ‘재험종지수재덕(在險終知輸在德)’이라고 했다. 산하이관이란 요충지에 와서야 마침내 명나라 멸망은 덕행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조선 문인 이기헌은 1801년 산하이관의 상업과 무역이 번성한 모습을 보고 ‘금전불한화이계, 호월진성일통가(今天不限華夷界, 胡越真成一統家)’이라고 했다. 지금의 산하이관은 한족과 이민족의 경계가 아니라 방방곳곳의 각 민족이 진정한 한 가족이 되는 곳이라는 뜻이다. 19세기 조선인의 눈에 비친 산하이관은 이미 안전의 요새, 한족과 이민족을 가르는 장벽 등 역사 흥망을 지나 상업과 무역, 소통과 교류의 허브가 돼 있었다.

중국의 입장에선 수백 년 동안 외국 문인들이 중국의 어떤 지역을 집중적으로 시로 묘사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조선 문인의 붓 끝으로 표현된 ‘산하이관’의 변화는 소통과 교류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이제 중국은 개방의 대문을 닫지 않고 점점 더 확대할 것이다. 이는 한국을 포함한 각국 국민이 중국을 교류 방문하는 데에 더 나은 조건을 마련해줄 것이다.


글|위셴룽(喻顯龍), 베이징(北京)대학교 국제관계대학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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