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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당(唐)의 불교 교류와 혜초선사


2019-09-19      

고대 중국과 조선반도(한반도)는 서로 밀접하게 왕래하며 종교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신라 시대의 혜초선사는 양국의 불교 교류에 앞장선 인물 가운데 하나다.

<유당신라국고지리산쌍계사교시진감선사비명(有唐新羅國故知異山雙溪寺教謚真鑒禪師碑銘)>의 기록에 따르면, 혜초선사의 조상은 중국 한인(漢人)으로 본적은 산동(山東)이다. 그의 선조는 당나라군의 고구려 정벌 때 신라로 흘러 들어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혜초선사는 신라시대 전주(全州) 금마(金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가수행을 하는 거사(居士)로서 이름은 창원(昌元)이고 어머니는 고(顧) 씨였다. 어느 날 어머니 고 씨의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 “그대의 아들이 되겠소”라며 유리로 만든 등을 선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 씨는 혜초선사를 낳았다.

혜초선사는 어릴 때부터 불법(佛法)을 잘 따르며 부처님에게 꽃을 공양하거나 서역을 향해 절을 하기도 했다. 불교를 마음 깊이 품고 있던 혜초선사는 성인이 되어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당시 불법이 번성하던 당나라로 건너가 구법을 하기로 마음 먹는다.
804년, 혜초선사는 뱃사공 잡부로 신라의 당나라 사절단에 섞여 들었다. 배가 당나라에 도달했을 때 신라 사신들에게 “사람은 각자의 뜻이 있으니 청컨대 이만 헤어지기로 합시다(人各有誌, 請從此辭)”라는 말을 남기고 사절단을 떠나 홀로 구법의 길로 들어섰다.

당시 중국 북부지방 창주(滄州)(현 허베이(河北)성 창저우(滄州)시)의 신감대사(神鑒大師)가 덕과 수행력이 높다는 말을 들은 혜초선사는 곧바로 알현을 위해 길을 떠났다. 신감대사를 만나 예를 갖추려는 찰나, 신감대사가 먼저 입을 열어 말했다.

“전생에 우리의 헤어짐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현생에서 이렇게 또다시 만나는구나.” 

그는 신감대사의 제자가 되어 정식으로 출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감대사의 심인(心印)을 별도로 전수 받았으며, 선종대법(禪宗大法)을 얻게 되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에 외모 또한 볼품 없고 낯빛이 까무잡잡했던 까닭에 도반들은 그를 ‘흑두타(黑頭陀)’라고 불렀고, “동방의 성인이 다시 나타났다(東方聖人於此又現)”고 몰래 칭찬을 하기도 하였다.

810년, 숭산(嵩山) 소림사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혜초선사는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온 신라의 또 다른 승려 도의국사(훗날 신라 가지산파의 종조가 됨)와 만나게 된다. 두 승려는 함께 의기투합하여 중국 각지를 두루 돌아다니다 825년 무렵 도의국사는 신라로 돌아가 불교를 알리는 데 힘쓰기로 하고, 혜초선사는 방랑을 계속하기로 했다. 혜초선사는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가 3년의 고행을 거친다. 

830년 혜초선사는 신라로 돌아가 불법을 전파하기로 한다. 혜초선사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흥덕왕은 성대한 환영회를 베풀고 그가 설악산 장백사(長柏寺)에 머무를 수 있도록 하였다. 흥덕왕은 또한 혜초선사와 앞서 귀국한 도의국사를 ‘대보살’에 비유하며 혜초선사를 눈앞에서 직접 보는 일을 ‘온 나라가 기뻐하고 의지할 일(舉國欣賴)’이라고 표현하고, 그의 홍법 활동을 적극 뒷받침했다.

이때부터 장백사를 찾는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지만 사찰 규모가 작아 혜초선사는 부득이 지리산 옥천사(玉泉寺)로 자리를 옮긴다. 그 후 중국에서 가져온 차나무 씨앗을 사찰 주변에 심고 옥천사를 ‘쌍계사(雙溪寺)’로 개명하였다.
 
850년 혜초선사는 향년 77세로 입적한다. 혜초선사가 입적한 후 3년이 지나 신라 헌강왕은 그에게 진감대사(眞鑑大師)라는 시호를 부여했고, 후손들은 절탑을 지어 그의 사리를 모셨다. 뛰어난 문장가였던 최치원이 직접 쓴 탑비는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한 혜초선사는 중국의 불교 예술인 ‘범패(梵唄)’를 한국에 전파함으로써 ‘한국 범패의 시조’라 불리기도 한다. 범패란 비구나 비구니 관련 의식을 거행할 때 불보살 앞에서 읊거나 공양하거나 찬탄하는 소리를 내는 수행법문이다. 당시 혜초선사는 범패의 맑은 음색을 통해 제자와 신도들을 교화시켰고, 그 덕분에 신라에도 범패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중국 범패는 신라의 전통 예술과 빠르게 융합하여 점차 신라 특유의 범패 음악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거꾸로 다시 중국에 전파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승려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당나라 산동 등주(登州) 적산(赤山)에 있는 신라 법화원(法華院)에서 불경을 읽기 전 범패를 낭송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장면이 있다. 이 중 “음률의 곡조가 당나라 음악 같지 않고 신라 식을 따르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통해 당시 중국과 한국의 불교 문화가 서로 끊임없이 왕래하고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베이징대학 국제관계학부 국제관계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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