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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수(高山流水)

-‘지음(知音)’의 유래와 의미


2019-09-19      

‘고산유수’라는 사자성어는 언뜻 자연 경관을 의미하는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을 서로 이어붙여 만든 명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뜻은 자연 풍경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 주로 현악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표현할 때 쓰이는 이 말 속에는 ‘지음’과 관련된 중국 고대 문인들의 감동적인 고사가 숨어있다. 이를 통해 높은 예술적 경지를 추구했던 중국 고대 문인들의 정신과 중국인들이 우정을 나누는 방식을 엿볼 수 있다.

백아와 종자기
고산유수는 <열자·탕문(列子·湯問)>, <설원·존현(說苑·尊賢)>, <여씨춘추·본미(呂氏春秋·本味)> 등 중국의 고전에서 유래됐다.

중국 춘추(春秋) 시기, 초(楚)나라에 유백아(兪伯牙)와 종자기(鍾子期)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총기가 남다르고 거문고 연주 실력이 뛰어났던 백아는 이름난 스승을 두루 사사했다. 하지만 그의 거문고 연주를 칭찬하는 사람은 많아도 곡조에 담긴 심정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훗날 진(晉)나라의 대부(大夫)가 된 백아는 군주의 명에 따라 초나라의 사신으로 길을 가던 중 강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바람이 잦아들고 휘영청 밝은 달이 고요한 구름 사이로 유유히 흘렀다. 달빛이 쏟아지는 강물을 바라보던 백아는 문득 정경에 취한 듯 거문고를 켜기 시작했다. 연주가 끝나자 강가에서 누군가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백아는 강가에서 한 나무꾼이 자신의 연주를 듣고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의 배로 청한 뒤 진심을 다해 연주를 시작했다.

백아가 높은 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곡조에 이르렀을 때 나무꾼은 “웅장하고 장엄한 곡조가 마치 구름 위로 솟아난 태산을 떠올리게 하는군요!”라고 했다. 파도를 연주하는 곡조에서는 “도도하게 일렁이는 곡조가 마치 드넓은 바다와 같습니다!”라며 감탄했다. 자신이 연주하는 심상을 처음으로 정확히 짚어주는 사람을 만난 백아는 흥분하여 “당신이 나의 지음이구려!”하고 소리쳤다. 그 나무꾼은 바로 종자기였다. 의형제를 맺은 두 사람은 내년 중추일(中秋日) 무렵 그곳에서 다시 만나 연주를 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듬해 중추일이 되어 백아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 종자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백아는 인근 마을 사람들을 통해 종자기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듣고 사람들이 일러준 종자기의 무덤을 찾아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이윽고 백아는 거문고를 꺼내 들고 종자기를 생각하며 고산유수를 그리는 곡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연주를 마치고는 “세상에 지음이 없으니 앞으로 누가 나의 연주를 알아줄 것인가?”라며 패검을 꺼내 거문고의 줄을 자르고, 부서진 거문고 조각을 종자기의 제단에 바친 후 다시는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다.

백아와 종자기의 일화는 형초(荊楚) 지역을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전해졌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지역은 현재의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시 한양(漢陽) 서쪽지역 한수이(漢水) 남쪽 기슭의 친돤커우(琴斷口) 유역으로 전해진다. 현재 한양의 웨야후(月牙湖) 강가의 구친타이(古琴臺) 또는 백아타이(伯牙臺)라 불리는 작은 기념관 역시 백아와 종자기의 우정을 기리기 위해 후대인들이 지은 것이다.

중국 고대의 이름난 문인들은 이들의 우정을 다양한 문학작품에 담아냈다. 당나라 이백은 <월야청노자순탄금(月夜聽盧子順彈琴)>에서 “종자기가 없는 세상에는 지음도 없구나”라고 읊었고, 북송의 구양수는 <봉답후포견과총시지작(奉答厚甫見過寵示之作)>에서 “그대의 연주는 백아의 곡조이니, 예로부터 지음을 구하기가 어렵다 했도다”라고 하였다. 현대 중국인들도 자신을 알아주는 벗에 대한 순수한 우정을 지칭할 때 ‘고산유수와 같은 지음을 찾는다(高山流水覓知音)’라는 시문을 인용하곤 한다.

중국 곳곳에 흐르는 ‘지음문화’
고산유수에 얽힌 두 지기(知己)의 고사는 아름다운 시문과 함께 중국 문인들의 정신세계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며 조금씩 ‘지음문화’를 형성했다.

지음문화의 핵심은 ‘지(知)’에 있다. ‘나를 알고, 나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우정에 비해 지음은 한 차원 더 높은 정신적 경지에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 간의 끈끈한 감정은 이처럼 지음을 바탕으로 생겨나기에 옛 사람들은 ‘지음을 만나기가 어렵다(知音難覓)’고 탄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 역사를 잘 살펴보면 이러한 지음 관계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위진(魏晉) 시기의 완적(阮籍)과 혜강(嵇康)도 그 중 하나다. 완적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백안시(白眼視)한다 하여 ‘청백안(靑白眼)’으로 유명했고, 혜강은 ‘상나라, 주나라의  예법을 멸시하고 허울뿐인 가르침을 넘어 세속에 얽매이지 않는다(非湯武而薄周禮,越名教而任自然)’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완적은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신 뒤 장례를 위해 찾아온 조문객들을 홀대했다. 그런데 혜강은 완적 모친의 영정을 모신 방에 술과 거문고를 가지고 들어갔다. 이에 완적은 “일생을 고생하다 돌아가신 모친을 음악과 술로 송별하러 온 것이구나”라며 벌떡 일어나 혜강을 맞이했다. 이처럼 두 사람이 서로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었던 데는 기존의 규율과 속박을 벗어난 자유로운 성품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음’에는 높은 정신적 차원의 소통과 우정 외에도 ‘생사를 함께 한다’는 뜻도 들어있다. 백아가 자신의 벗 종자기의 무덤 앞에서 거문고를 부순 까닭은 연주자로서 자신의 생명이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행위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정신만큼은 깊은 감동과 탄복을 자아낸다.

중국의 유명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은 <소오강호(笑傲江湖)>에서 백아와 종자기를 모델로 삼아 두 캐릭터를 창조했다. 칠현금에 능한 일월신교(日月神敎)의 장로 곡양(曲洋)과 퉁소 연주의 달인인 형산(衡山)파의 2인자 유정풍(劉正風)이다.

마교(魔教)에 속해 있었지만 깨끗하고 맑은 마음을 지닌 곡양은 유정풍을 만난 뒤 함께 음률에 관해 진지하게 탐구하기로 한다. 이후 유정풍이 강호에서의 은퇴를 위해 황금대야에 손을 씻는 ‘금분세수(金盆洗手)’ 의식이 거행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무림 정파(正派)에 속한 유정풍이 마교, 즉 사파의 장로인 곡양과 친분을 맺는 것은 가히 만천하의 분노를 사는 일이었다. 결국 정파에 의해 형산으로 쫓겨나고 처자식이 죽임을 당하며 제자들이 살해 당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유정풍은 중상을 입은 곡양에게 결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두 사람은 마지막에 강물을 배경으로 하는 추격전에서 칠현금과 퉁소를 들고 ‘소오강호’라는 합주곡을 연주한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의 흐르는 강물 사이로 구슬픈 곡조가 길게 울려퍼진다. 칠현금과 퉁소의 엇갈리는 음률 속에서 두 사람은 마주보며 웃음짓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스로 동맥을 끊고 동시에 자결을 택하는데, 많은 시청자들의 뇌리에 강렬하고도 가슴 아픈 장면으로 남았다.

지음을 찾는 행위는 정신적 벗을 만나고자 하는 일종의 내면적인 심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중국의 고대 문인들 중에는 완적이나 혜강처럼 자연 속에 숨어 살기보다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정신으로 실용성을 추구하는 이들도 많았다. 중국 사대부들은 문학이나 예술을 통해 지음을 찾기도 하고 국가를 통치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뜻이 맞는 귀인을 찾아 다니기도 하였다.

당나라 산문의 대가였던 한유(韩愈)는 단편 <마설(馬說)>에서 전국시대에 말 감정을 잘 하기로 유명했던 백락(伯樂)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먼저 백락이 있고, 이후에 천리마(千里馬)가 생겨났다. 천리마는 흔하지만, 백락은 흔하지 않다. 아무리 뛰어난 명마라 하더라도 백락의 눈에 들지 못하면 천리마의 이름을 얻지 못하고 마부의 손에서 온갖 홀대를 받다 평범한 말들처럼 마구간에서 죽어갈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에서도 고산유수의 고사와 관련한 기술이 나온다. “거문고는 곡조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 외에도 이것을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 필요하다. 이 사회에 현인과 달인이 있어도 그것을 알아보고 예를 갖춰 대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능력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는가? 중국 역사를 돌아보면 수많은 현자(賢者)와 지자(智者) 모두 지기를 만나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따라서 왕과 신하, 나라와 백성, 장군과 병사 간에도 이처럼 지음을 통해 도타운 감정을 쌓아야 한다.‘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士為知己者死)’, ‘지우지은(知遇之恩)’ 등의 말이 가리키는 바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지음의 고사에서 비롯된 중국의 사귐 문화와 정신은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글|스중젠(石鐘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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