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칼럼 >> 본문

2019-09-19      

2019년 7월 16일,고궁박물관 무영전에서 ‘량주와 고대 중국: 옥기를 통해본 5000년 문명전’ 개막식이 열렸다. 전시는 2019년 10월 20일까지 이어진다. 사진/궈사사(郭莎莎)

2019년 7월 6일 ‘량주 고성유적’이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되면서 중국의 55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 량주고성유적은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시에 위치해 있으며, 타이후(太湖) 유역의 초기 지역적 국가 권력과 신앙의 중심지였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량주 고성유적은 기원전 3300년부터 기원전 2300년까지의 성터, 기능이 복잡한 외곽 수리(水利) 공사와 동시대 여러 등급의 무덤(제단 포함)으로 이뤄져 있다. 아울러 신앙체계를 상징하는 옥기로 대표되는 일련의 출토품들은 그 깊이와 가치를 짐작케 한다. 

2019년 7월 16일 ‘량주와 고대 중국-옥기로 보는 5000년 문명전’ 개막식이 고궁(故宮)박물원 무영전(武英殿)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회는 중국 9개성 12개 박물관 등이 소장 중인 260개 보물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로, 량주고성유적의 세계문화유산목록 등재 성공 이후 최초로 공개되는 것이다. 전시회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신석기시대 량주문화부터 명(明)·청(淸)시기까지 중화문명 5000년의 문화를 아우르고 있다. ‘서두(引子)’ ‘신왕지국(神王之國)’ ‘문명전승(文明傳乘)’ ‘맺음말’ 4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량주문명 초기 국가 특징과 후대 문제에 미친 영향 등을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반영했으며, 중화문명의 표식체계 구축 과정 중 량주문명의 기여와 독특한 역할 또한 과학적이고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이와 함께 무영전 동·서쪽의 곁채에서는 량주고성유적의 고고학적 연구와 보호, 문화유산목록 신청 과정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5000년 전 중국의 초기 문명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으며, 오늘날 사람들이 유적 보호와 연구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량주의 최고 통치자는 더 이상 일반적인 씨족사회의 추장이나 부락의 우두머리가 아닌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는 왕이자 천지와 소통하는 신령의 화신이었다. 사진/궈사사

국가의 예제(禮制), 신(神)의 휘장 
예제는 고대 중국이 사회질서 구축·국가안정 유지·행위방식 규범화를 위해 형성했던 전통 문화 중 하나로, 량주문명 예제에서 가장 대표적인 물질 매개체가 옥기다. 고대 중국에는 ‘국지대사, 재사여융(國之大事 在祀與戎, 국가대사는 제사와 전쟁에 있다)’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러한 이념은 량주문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량주 국왕은 신권과 군권·왕권을 보유했고, 옥기는 바로 왕실 권력의 상징이었다. 저장성 위항판산(余杭反山) 12호 무덤은 량주 국왕의 무덤으로,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두 개 유물, ‘종왕(琮王)’과 ‘월왕(鉞王)’이 이곳에서 출토됐다. 

옥종(玉琮)은 량주문화시기에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던 예기(禮器)이자 신권의 상징으로서, 량주 선민의 우주관과 정신적 신앙을 담고 있다. 량주문화시기의 ‘종왕’은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다. 먼저 오늘날까지 조각 장식이 가장 정교하고 품질이 가장 뛰어나며 크기 또한 가장 큰 옥종이 바로 ‘종왕’이다. ‘종왕’의 안쪽은 둥글고 밖은 사각형을 띠고 있으며 가운데는 뚫려 있다. 사면의 아래 위에 각각 신인수면(神人獸面)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모두 저부조와 선각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장방형으로 볼록한 면에는 추상적인 신인수면 도안이 조각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일반적인 유물에서는 도철문을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달리, 옥종에는 비교적 형태가 완전한 신인수면상이 조각되어 있다. 즉, 신휘(神徽)는 량주문화에서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문화부호이자 상징인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신인수면문양이 량주 선민이 신봉했던 유일한 신지(神祗)의 형상이었으며, 량주사회 신앙이 초기 씨족의 다신(多神)신앙에서 유일하고 고도로 일치된 정신적 신앙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전시장에는 모래로 만든 고대 량주문화 유적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사진/궈사사

한자에서 최고 권력자를 대표하는 ‘왕(王)’이라는 글자는 월(鉞)이 변하여 생긴 상형문자다. ‘월’은 도끼 형태를 띠고 있다. 또, 한자 중 남성 어른을 뜻하는 ‘부(父)’자는 손에 도끼를 든 형상이 변하여 굳어진 글자다.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는 바로 권력을 의미한다. 저장성 판산 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옥월은 신인수면문양과 조문(鳥紋)이 새겨진 유일한 옥월로, ‘월왕’이라고도 불린다. 이러한 화려한 형태의 옥월은 왕의 지팡이로서 권력과 위엄을 상징한다. 손잡이에는 옥을 박아 넣고 옻칠을 하였으며, 아래 위는 옥모(玉瑁)와 옥돈(玉鐓)으로 장식되었다. 옥모의 모양은 신휘의 관모(冠帽) 형태를 따름으로써 왕권의 신성함을 드러냈고, 옥돈 위에는 타원형의 돌출된 부분이 있는데 내부는 비어있다. 돌출된 부분 아래는 변형된 조문과 신인수면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량주 국왕 휘하의 ‘종왕’과 ‘월왕’은 바로 량주 최고통치자의 강력했던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함의 상징임과 동시에 량주 옥기는 량주사회의 세속적인 물질생활 중 가장 정교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량주 옥기 중 적지 않은 것들이 장식적 기능 혹은 용기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탁(鐲)이나 환(環)은 사람들이 팔에 차던 장신구이고, 황(璜)과 관(管)·주(珠)를 꿰어 만든 장신구는 가슴이나 목을 치장하던 것이었다. 또, 옥소배(玉梳背)는 머리카락을 꾸미던 것이었고, 옥수저와 옥국자는 음식을 먹을 때 쓰던 도구였다. 이밖에 많은 옥기들이 의복을 꾸미는 데에 사용되었다. 옥기가 량주인들의 일상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옥을 사랑하고, 중국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일찍부터 옥을 사용한 나라다. 연대별로 봤을 때 가장 오래된 옥기가 량주 옥기는 아니지만, 량주문명시기에 옥기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조각기술이 등장했다. 량주 옥기의 문양과 정교하면서도 세밀한 조각선, 생동감 넘치는 신인(神人)의 형상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는 량주 선민이 개발한 주상성형(柱狀成形) 공예에 기인한 것으로, 음각·부조·누공(鏤孔)·투조(透雕) 등의 방식은 옥기 제작의 효율을 높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옥기의 정교함을 더해 주었다. 오늘날과 같은 조각공구가 없었던 석기시대에 그와 같은 조각수준은 실로 범상치 않은 것이다. 

옥월(玉钺)(구성품). 량주문화 시기, 저장성박물관 소장 사진/궈사사

량주 선민은 통일된 신의 이미지를 창조했고, 종과 벽(璧)·월 등을 대표로 하는 확실한 서열의 옥 예기 시스템을 설계했다. 량주 최고 통치자는 왕권을 갖고 신권을 통제함으로써 정교합일(政敎合一)의 특징을 드러냈다. 이는 오늘날 잘 알려진 최초의 국가형태로서 ‘신왕지국(神王之國)’이라 불리기도 한다. 량주문화는 지금으로부터 4300년 전부터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지만, 그 문명요소는 량주 옥기와 함께 체계적으로 전승되었으며, 영향력 또한 중국 전역에 미쳤다. 

옥기둥(玉柱) 모양의 문물 중 일부. 량주문화 시기, 저장성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사진/궈사사

역사를 향한 진실, 미래로 나아가는 계승 
량주는 수중의 아름다운 소주(小洲)라는 의미로, 항저우 인근에 위치한 량주는 산천이 아름다운 곳이기도 하다. 1936년 저장성박물관 직원 스신겅(施昕更)의 우연한 발견은 량주와 중화문명의 기원을 하나로 연계시켰다. 지금으로부터 5300-4300년 전에 이르는 신석기시대 말기, 량주는 ‘창름실즉지예절(倉廩實則知禮節, 재산이 풍족하고서야 비로소 예절을 알아차린다)’의 이상적인 국가였다. 280만㎡의 내성(內城)은 자금성 4개에 맞먹는 규모다. 산과 강에 둘러싸여 있는 국가의 도성은 강과 돌·흙으로서 지어졌고, 3중구조는 존엄함을 드러낸다. 높은 건축물과 서로 통하는 수로(水路)도 있다. 량주의 도성은 량주 권력과 신앙의 중심이었다. 

량주고성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창장(長江)유역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중화문명 기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또한, 량주고성유적지가 고대 중국이 도시계획에 있어서 사회계급질서와 권력을 강조했던 전형적인 방법을 대표하고 있다는 이유도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창장 유역 초기 단계에 구축되어 다른 지방에서도 여러 차례 응용되었다. 이와 함께 습지환경에서 도시를 건설하고 건축물을 건조했던 특징, 인류문명사상 초기 도시문명의 뛰어난 범례라는 점도 <세계문화유산목록> 등재의 배경이 되었다. 

우인옥벽(羽人玉璜). 량주문화 시기, 저장성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사진/궈사사

옥황(玉璜). 량주문화 시기, 고궁박물관 소장 사진/궈사사

최초 발견에서부터 등재에 이르기까지의 83년 간 량주유적지는 세계로 뻗어갔다. 이는 분명 한 세대 사람들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위대한 성과다. “옥종은 중화 5000년 문명의 실물 증거다. 량주유적지는 중화 5000년 문명사를 실증하는 성지다.”량주 고고학자 쯔쯔(孜孜)는 량주유적지의 가치를 이같이 정리했다. 그는 4대째 이어지고 있는 고고학자들의 노력을 이어받아 량주문명에 대한 탐색과 발견을 멈추지 않고 있다. 1936년 스신겅 선생이 그의 고향 량주진에서 량주유적지를 발견한 이후 1980년대 저장성문물고고연구소의 머우융캉(牟永抗)·왕밍다(王明達) 선생이 판산유적과 야오산(瑤山)유적을 발견했고, 많은 옥기들이 출토되었다. 이때부터 중화 5000년 문명을 이야기할 때면 량주유적을 빼놓을 수 없게 되었다. 지난 10년 동안은 3대 고고학자인 류빈(劉斌)과 왕닝위안(王寧遠)이 성벽과 수리시스템을 발굴했고, ‘중화 제일의 성’과 ‘세계 제일의 댐’이라는 웅장한 구조물을 공개했다. 

옥황(玉璜). 량주문화 시기, 고궁박물관 소장 사진/궈사사

옥종(玉琮). 량주문화 시기, 저장성박물관 소장 사진/궈사사

량주의 모든 시간과 공간은 5000년 전의 이야기에서 시작되고 있다. 5000년 전 이 땅은 문명의 고지였다. 거대한 궁전의 터와 웅대한 성벽·오래 되었지만 방대한 규모의 수리공정, 그리고 권력과 신앙을 상징하는 정교한 옥기들까지…. 량주고성유적지는 5000여 년 전 이룬 중국 문명의 위대한 업적이다. 역사의 강 속으로 사라진 5000여 년 전의 량주 선민이 다시 살아났다. 80여 년간 이루어졌던 량주유적지 연구는 힘들고 고됐지만 그 안에서 발견한 것은 귀중한 보물이었다. 문명의 뿌리를 따라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수용과 관용으로 나아가며 중화 문명의 영원한 전승이라는 눈부신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글|톈샤오(田瀟)

240

< >
网站专题小背景.png

광시와 한국, 맞잡은 두 손으로 쓴 우정의 새 장

초여름의 광시(廣西) 난닝(南寧)시에서 교류의 축제가 열려 중한 양국 국민들간 마음의 거리를 더욱 좁혀주었다.

읽기 원문>>

중한 인문교류를 활성화한 성대한 축제

오랜 역사를 함께 한 이웃인 중국과 한국처럼, 광둥(廣東)성과 한국 역시 경제·무역·인문 등의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