獨在異鄕爲異客, 每逢佳節倍思親.
遙知兄弟登高處, 遍插茱萸少一人.
Dúzài yìxiāng wéi yìkè, měiféng jiājié bèi sīqīn.
Yáozhī xiōngdì dēng gāochù, biànchā zhūyú shǎoyìrén.
독재이향위이객, 매봉가절배사친. 요지형제등고처, 편삽주유소일인
홀로 낯선 땅에서 낯선 사람 되고 보니,
명절 때마다 혈육들 그리운 마음 몇 배 더하네.
형제들 높은 데 올라 논다는 것 멀리서도 안다오,
다들 수유 열매를 달았는데 한 사람만 빠져 없네.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을 타향에서 맞으며 고독과 그리움을 노래한 시다. 왕유(AD 701-761, 699-759?)의 친가는 포주(蒲州, 지금의 산시(山西)성 용지(永濟)시), 제목에 보이는 ‘산동’이란 그래서 ‘산동성’이 아니라 ‘화산(華山)의 동쪽’을 뜻한다. 獨在異鄕爲異客, 異가 두 번 나왔으나 같은 구 내에서는 흠이 아니라 기교이다. 제4구 插은 현대중국어로 1성이지만 입성(入聲)이라 평측에 잘 맞는다. 현대어에도 받침소리(입성)가 살아있는 한국어발음으로 당장 판별할 수 있다. 제1-2구를 적절히 활용하면 당신의 중국어 품격이 한층 높아질 것이다. 九가 두 번 겹친다 해서 별명이 ‘중구(重九)절’인 중양절, 금년 2018년은 10월 17일에 돌아온다. 음양오행 관점으로 볼 때 양기가 충만한 날이다. 예로부터 먹고 마시고 좋은 경치를 구경하며 즐겼다. 중추절(추석) 이후 화창한 날씨가 계속되는가 하면 일년 중 먹거리도, 즐길거리도 많은 시기다. 놀기 좋은 중양절이다 보니, 함께 놀던 친구나 형제들 생각이 부모님 생각보다 앞섰던 걸까. 제목부터 ‘형제를 그리며’다. 실제 맏형 왕유는 동생들과 우애가 깊어, 훗날 안사의 난 직후 정치적 곤경에 빠졌을 때 세 남동생 가운데 진(縉)이 자신의 관직을 걸고 탄원해 관대한 처분을 이끌어낸 바 있다.
이 칠언절구는 왕유가 고향을 떠나 수도 장안에서 출세의 길을 모색하던 17살 때 작품이다. 유명한 후기작들에 비해 소박한 감정, 꾸밈없는 표현의 풋풋함이 있다. 731년 과거 급제하기까지 왕유는 십 수년 동안 이런 수험생(취업준비생) 세월을 보냈다. 물론 그 시대의 과거 수험생은 관료 후보군이었고, 詩書畵나 음률에 정통하면 상류층 모임에 불려 다닐 수도 있었다. 취업준비를 위해 대도시에서 홀로 지내는 요즘 우리 젊은이들의 팍팍한 삶에 비할 수는 없으나, 이 작품에 보이는 ‘이방인’의식 같은 것이 시인의 감성에 긴요한 체험이었음은 분명하다. 제국의 수도 장안의 번화함, 들뜬 분위기 속에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으리라. 제3-4구의 담담한 우회적 표현에서 오히려 절절한 그리움과 고독이 드러난다.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 또한 강하다.
남송화(南宋畵)의 시조로 추앙받는 왕유는 문인화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는 몇 백 년 후 소식(蘇軾, AD 1037-1101)의 평어는 너무나 유명하다. 대부분 왕유 후기작에 해당되는 말이지만 그냥 지나치기 서운해 첨언해둔다.
수재 소리를 들으며 자란 왕유는 장원급제로 과거를 거쳤을 뿐 아니라 음악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날렸다. 출중한 인물이란 본래 처신이 어려운 법. 혼란스런 시대상도 있었겠으나 관직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안사의 난 당시 난군의 포로로 낙양에 끌려가 본의 아니게 새 조정의 관직을 맡았고 난이 평정된 후 이 일로 엄한 책임추궁을 당한 것은 결정적 위기였다. 인간세상이 싫어지고 자연(산수) 속에서 자신을 찾게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일찍부터 어머니 영향으로 친숙한 불교적 세계관 역시 그에게 큰 위안을 제공한다. 본명보다 더 많이 쓰이는 이름 자(字) 호를 ‘마힐’ ‘마힐거사’라 했을 정도로 불교와 가까웠다. ‘유마힐’이란 재속(在俗)신자의 이상형으로 꼽히는 인도사람 유마힐(維摩詰, Vimalakīrti의 음역), 바로 중국에서 널리 읽히고 초기 선종(禪宗)에서 매우 중요시된 불경 <유마힐경>의 주인공이다.
중양절의 하이라이트 登高, 그 자체는 이 날의 다른 행사들보다 역사가 오래 되었으며 많은 시인묵객들이 작품을 남겼다. 빨갛게 익은 수유(열매)나뭇가지를 꽂거나(插茱萸), 열매를 채운 주머니를 차고 ‘높은 곳에 올라(登高)’ 국화주를 마시며 시회를 벌이기도 한다. 수유열매 주머니는 후한(後漢, AD 25-220)시대 이래의 ‘액막이’ 풍물인데 오늘날 예쁘장한 일상용품으로 진화했다. 주로 여성들이 작은 소도구들을 담아 휴대하는 일종의 파우치 ‘茱萸袋子(zhūyúdàizi)’가 그것이다. 소염진통 효능의 한약재인 수유(열매)는 단오절 행사의 쑥(艾)처럼 환절기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 않도록 하는, 풍요로운 계절일수록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삼가는 마음자세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중양절은 단풍구경과 함께 시와 술을 즐기는 날이었다. 중양절 하루, 사라진 옛 풍속을 되살려 알뜰히 챙겨 먹고 마시고 즐긴다면 그 또한 사는 재미이자 일상의 멋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