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폭의 수묵화, 초충도(草蟲圖) 같은 칠언절구다. 작은 옹달샘, 그 위에 드리운 나무그늘,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연 새싹, 그 위에 앉는 잠자리…… 더 이상 더하거나 뺄 것 없는 완전한 우주, 네 가지 경물(景物)이 빚어내는 세계가 아기자기 정겹다. 잔잔함 속에 넘실대는 생명현상의 감동이랄까, 단아함 섬세함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랄까, 절경의 화려 장엄함과는 다른 차원의 울림이 있다.
각 구에 하나씩 놓인 4개의 글자(惜, 愛, 才, 早)에 주목하자. ‘愛惜(애지중지하다)’을 연상시키며 전반 2개 구에 惜-愛가 각각 배치된 다음, 대칭되는 어감의 부사들이 후반부를 엮어냈다. 才(이제서야 겨우)-早(벌써), 살짝 반전이 더해진 것이다. 겨우 새싹을 내민 연과 그 위에 일찌감치 올라 앉은 잠자리, 마치 절정의 순간을 앞둔 감미로운 긴장,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선취하는 미물에 대한 경탄이 들리는 듯하다. 물아(物我)의 구분은 사라졌다. 옹달샘-나무그늘, 그들과 일심동체가 된 시인, 연 새싹-잠자리, 내부자로서 그것들을 관조하는 시인, 하나 같이 온전한 우주의 삼라만상일 뿐이다.
양만리(AD 1127-1206), 자는 정수(廷秀), 호는 성재(誠齋)이다. 강서(江西)성 길수(吉水) 태생으로 우무(尤袤), 범성대(範成大), 육유(陸游)와 함께 ‘남송 4대가’로 불린다. 평이하고 자연스런 시어, 기발한 발상, 소탈함, 경쾌함, 재치 등이 그의 시 세계를 구성한다. 이전 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다가 50대 들어 독창적인 경지(誠齋體)를 이뤘다고 평가되는데, 이 <작은 연못>은 그 대표작의 하나다. 자연 풍경과 사물의 찰나적 디테일 속에 깃든 영원한 심미안이 포착되고, 의인화 내지 물아일체로 감정이입이 극대화되어 있다.
송나라(AD 960-1279)는 중화문명 특유의 문치(文治) 전통이 확고히 자리잡는 시기다. 우주관 인생관을 관통하는 철학체계, 훗날 ‘주자학’으로 불릴 유학의 새로운 흐름이 등장했고, 과거제 정착과 더불어 학자-관료-시인(산문가)의 유기적 통일체, 즉 지식-권력 선(善)순환 구조의 핵심인 사대부 계층이 뚜렷한 성장을 보였다. 그렇다 보니 문약한 왕조였고 북방 이민족의 위협 앞에 늘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송은 금나라 침입으로 한번 멸망하는 바람에 두 시기로 나뉜다. 개봉(開封)이 함락되어 휘종 흠종 두 황제가 잡혀가고 흠종의 동생이 피난 가 양자강 남쪽 임안(臨安, 현재의 항저우)에 다시 세운 송나라를 남송, 그 이전을 북송이라 한다. 화중지역이 개발되고 국제교역도 활발한 가운데 문인문화가 꽃핀 남송기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내내 화친론 주전론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난세였다. 양만리는 북송 망국의 해에 태어나 27살 때 진사 급제, 네 황제들(제1-4대)의 치세기간 지방과 중앙의 관직을 지냈다. 올곧은 성품의 사대부답게 금나라와 싸울 것을 주장했으며 부국강병을 위한 구상도 내려놓지 않는다. 고령을 이유로 사직(致仕)한 이래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끝내 거부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 좌절감과 울분이었다.
시 4200여 수(그 중 사(詞)는 15수)가 전해지며 <성재시화(詩話)>라는 시론 시평론집이 있다. 양만리의 실제 창작은 2만 수 이상이었다는 동시대 문인의 전언대로라면 대단한 다작이다. 시(詩)가 일상인 동시에 비일상이었던, 그야말로 삶 그 자체였지 싶다. 자연경물뿐만 아니라 시국 관련의 고민과 백성의 고통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많다. <천려책(千慮策)> 등에서 드러나는 바, 산문도 뛰어났다. <주역>에 밝아 <성재역전(易傳)>을 남긴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일찍이 공자가 최고의 책으로 치던 <주역>에 정통함은 우주-인생을 관통하는 근본원리 및 가치에 관심과 이해가 각별했다는 뜻 아닐까. 이런 점이 시적 감수성의 표현과정에 작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