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칼럼 >> 본문

한국 역사 속의 ‘관제(關帝) 신앙’


인민화보

2018-07-11      인민화보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묘 사진/위셴룽(喻顯龍) 

관우는 한국인에게 알려진 인물이다.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에서 충성스러운 이미지로 그려져 많은 한국인들이 그를 좋아한다.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고도 불리는 관우는 중국 민간에서는 신령으로 모신다. 관우를 신령으로 모시는 관제 신앙은 중국 고대에서 성행했다. 사람들은 관우가 자신을 보호하고 악귀를 쫓으며 행운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고대 한국에서도 관제 신앙이 유행했다. 조선 왕조 중·후기 오랜 기간 동안 정부와 민간에서 그를 신령으로 모셨다. 관제 신앙은 한국의 전통 무속 문화에까지 파고들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는 조선으로 원군을 파견했다. 당시 명나라 군대에는 관우에게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중요한 지역에 관우 사당을 지었다. 이렇게 관제 신앙이 조선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관우를 모신 사당을 ‘관왕묘(關王廟)’라고 불렀다. 경상도 성주와 안동, 전라도 남원과 강진 도에 관왕묘가 있었다. 조선의 수도인 한양에는 남관왕묘, 북관왕묘 등이 있었다. 현존하는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동관왕묘(동묘). 흥인지문(동대문) 근처에 있는 동묘는 선조 32년에 건립됐고 명나라 만력황제의 친필 편액이 걸려있다


조선 왕조의 군신은 매년 차례 갑옷을 입고 동묘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편안함을 빌었다. 조선 왕조가 관우를 숭상하고 소설 <삼국연의> 조선에서 유행하면서 관제 신앙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됐고 조선 백성들은 관우를 숭배하게 됐다. 당시 수많은 백성들은 관우가 보호해 왜란이 평정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 관우는 조선 민간에서 귀신을 쫓는 군신(軍神) 됐고 관제 신앙이 민간에 받아들여졌다.


사람들은 과거 관우가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승리를 도왔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한 근대 한국에서 많은 백성들이 관제 신앙을 믿는 비밀조직에 가입했다.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관우라는 명칭을 사용한 근대 종교집단이 당시 10 개가 넘었다고 한다. 1920 김윤식, 박기홍이 한성에 관성교를 창립하고 관우를 숭배한다고 천명했다. 1941 관성교에 등록한 신자수가 2000 명에 달했고 관제묘당이 7개였다.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에서 관우 신앙은 점차 쇠퇴했다. 그러나 역사와 소설 영웅으로서 관우는 한국인에게 여전히 존경받고 있다. 지난해 문재인 한국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해 재중 한인 간담회에 참석했다. 자리에서 관제 신앙을 언급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국에는 중국의 영웅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사당들이 있다. ‘삼국연의’의 관우는 충의와 의리의 상징으로 서울의 동묘를 비롯해 여러 지방에 관제묘가 설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를 보면 관제 신앙은 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뿐아니라 중한 문화 교류의 중요한 부분임을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240

< >
专题背景图.png

‘중한 연(緣)문화제’, 빙설의 정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아름다운 빛깔의 빙등(冰燈, 얼음 등)이 어둠에 가려있던 룽칭샤(龍慶峽)를 밝게 비췄다. 빙등은 마치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 같았다. 2월 3일 밤, 한국 충남국악관현악단과 뜬쇠예술단이 한국 전통공연인 ‘사물놀이’의 빠른 리듬에 맞춰 무대에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빙설정-중한 연 문화제’가 막을 올렸다. 이제 중한 연 문화제는 얼음과 눈을 다리 삼아 중한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읽기 원문>>

중한 관계를 이야기하며 한반도 미래를 탐색하다 -중한 미래발전 싱크탱크포럼 베이징서 개최

중국 차하얼(察哈爾)학회와 한국 국립외교원이 공동 주최하고 한국 아주경제신문사가 협찬한 ‘중한 미래발전 싱크탱크포럼’이 2017년 12월 11일 베이징(北京)에서 개막했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