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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젠궈, 중국 대외개방의 ‘산증인이자 안내자’


인민화보

2018-12-13      인민화보

웨이젠궈 중국 상무부 전 부부장,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 비서장  사진/ 궈사사(郭莎莎)

지난 40년 중국은 경제특구의 설립을 시작으로 WTO(국제무역기구)에 가입하고, 자유무역시험지구와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를 제시하는 등 대외 개방을 확대해나갔다. 세계화에 깊이 융합되는 과정에서 중국은 ‘발전의 기적’을 만들었고 세계 각국에게 ‘발전의 기회’를 주었다.

웨이젠궈(魏建國) 중국 상무부 전 부부장,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 비서장은 중국 개혁개방의 큰 물결을 직접 겪은 중국 개방의 ‘길 안내자’ 중 한 사람이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그는 감개무량한 듯 개혁개방이 중국의 면모와 운명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2017년 10월 31일, 베이징. 웨이젠궈 상무무 전 부부장이 ‘중·미 경제협력과 일대일로 포럼’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VCG

경제특구, 개방의 물꼬를 열다
1980년 8월 26일, 선전(深圳)특구가 공식 설립돼 중국 대외 개방의 서막을 열었다. 선전특구 설립 후 4년 동안 웨이젠궈는 주(駐)튀니지 중국대사관 상무처에서 일했다. 1984년 11월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대외경제무역부(현재의 상무부) 아프리카사무처 부처장을 맡았다. 이 1년 동안 중국의 고위층은 ‘인진라이(引進來, 외국의 자본, 인재, 관리 경험 기술 유치)’에 중점을 둔 대외개방 아이디어를 내놨다.

“1984년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이 선전을 방문했고, 내가 수행했다. 당시 가봉은 산유국이었기 때문에 경제 수준이 중국보다 높았고, 가봉 대통령은 중국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내 기억에 봉고 대통령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지지했다. 그는 우리가 걷는 길이 맞다고 생각했고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매우 컸다. 우리가 발전에 성공해 자신들에게 교훈을 주길 바랐다.” 웨이젠궈는 당시 중국을 방문하는 외국 정객과 기업계 인사가 계속 늘었고, 이들을 수행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특구 설립 실험이 성공을 거두자 중국은 우대혜택을 누릴 수 있는 개방 지역을 확대했다. 80년대 중·후반 다롄(大連), 친황다오(秦皇島) 등 14개 연해 항구도시와 창장삼각주(長江三角洲), 주장 삼각주(珠江三角洲) 등의 지역을 속속 개방했고 하이난(海南)경제특구를 설립했다. 90년대에는 상하이 푸둥(浦東)과 연강(沿江)도시, 국경도시, 성(省) 정부 소재지를 개방했다. 2000년 서부대개발이 진행되면서 서부지역까지 대외 개방을 확대했다. 이 때부터 전방위적인 대외 개방의 지역 구도가 기본적으로 형성됐다.

또한 중국은 대외무역, 외자 이용, 외환관리 등 분야를 점진적으로 개혁했다. 1978년부터 외환할당을 시행하고 수출입 심의 제한을 축소하며 대외무역 대리제를 도입하고 대외무역 도급 경영 책임제를 실시하며 국가 재정의 수출 보조를 없애고 외환관리체제 개혁 등 조치를 취했다.

1996년 중국의 고위층은 ‘인진라이’를 기반으로 한 ‘저우추취(走出去, 해외진출)’ 전략을 내놨다. 웨이젠궈는 “이 기간 동안 중국은 세계화에 융합되려는 열망이 강해져 WTO에 반드시 가입하려고 했다”고 회상했다.

WTO 가입, 세계화에 융합하면서 발전
1995년 중국은 WTO 가입을 정식 신청하고 당시 WTO 37개 회원국과 마라톤식 양자 협상을 시작했다. “WTO 협상은 올림픽 경기보다 훨씬 어려웠다. WTO 가입 협상은 회원국 모두와 협상을 해야 하고 모든 나라의 협상 조건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여러 협상 가운데 미국과의 협상이 제일 어려웠다.

1999년은 WTO 가입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해로, 중국과 미국은 자주 협상을 진행했다. 11월 10일부터 중국과 미국은 가장 어려운 단계로 돌입했다. 당시 웨이젠궈는 중국 대외무역경제협력부 부장보였다. “그때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샬린 바세프스키였다. 그녀는 매우 강경한 사람이었다. 11월 14일 양측의 협상이 결렬됐다. 그러나 중국측의 노력으로 15일 새벽 3시 협상이 재개됐다. 하지만 협상은 곧 난항에 빠졌다. 자동차 수입 관세, 특수 보장 조항, 과도기 조항, 진입 기준, 심지어 영화 수입 수량까지 양측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나 전환점도 이 긴 하루에 생겼다. 15일 오전 웨이젠궈는 자기 옆에 있는 전화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리웨이(李偉) 국무원 총리판공실 주임의 전화였다. 그는 ‘WTO 가입 협상이 당신네 부 어디서 진행되느냐’고 물으면서 ‘주룽지(朱镕基) 총리의 차가 곧 그쪽에 도착할 것이다. 총리가 직접 협상 현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중앙경제업무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우이(吳儀) 국무위원은 꼭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 총리가 직접 나설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즉흥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다.” 주룽지 총리가 있으니 중·미 협상에 희망이 생겼다. 양측 모두 한 발씩 물러났고 중국과 미국 간 WTO 가입 협상이 마침내 타결됐다.

이후 여러 차례 양자 및 다자 협상을 거쳐 2001년 12월 11일 중국이 WTO에 가입했다. “이로써 중국 경제는 세계 경제와 맞물리기 시작해 세계화에 거대한 활력을 주입했고, 중국에게도 대외 개방의 중요한 이정표가 됐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웨이젠궈는 중국 상무부 부부장으로 일했다. “나는 가공무역을 주관했다. 중국의 방직품 무역이 매우 빠르게 발전하던 시기였다. 당시 방직업은 중국에서 매우 큰 산업이었고 방직품은 중국의 전통적인 수출상품이었다.”

전기기계 제품이 아직 해외 진출을 하기 전이라 방직품은 중국의 1등 수출상품이었다. 그러나 WTO 가입 전 중국의 방직품은 쿼터제 때문에 매우 엄격한 제한을 받았다. “당시 미국은 우리에게 자발적 쿼터제를 시행했다. 즉 우리가 매년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타 방직품을 포함한 셔츠와 의류 모두 수량 제한을 받았다. 우리는 수동 쿼터의 제한도 받았다.” 웨이젠궈가 말하는 수동 쿼터란 <다국간 섬유협정(MFA)>을 말한다. 이는 미국이 발기해 체결한 협정으로 자국의 방직산업을 외부 충격에서 보호한다는 취지였지만, 결국 개도국에서 수입한 방직품 수량을 제한하는 조치였다. “당시 방직품을 놓고 우리가 구미 국가와 협상한 시간은 실제 수출업무 시간보다 몇 배는 많았을 것이고 훨씬 더 어려웠다.”

방직업 개방이 시급했지만 중국 국내에서는 개방 확대에 대한 저항이 여전히 존재했다. 웨이젠궈는 당시 개방은 수많은 압력 속에서 진행됐다고 말했다. “WTO 가입으로 농업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공업 분야, 특히 자동차업계에도 이런 우려가 컸다. 당시 자동차산업이 막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WTO 가입으로 중국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발전 기회를 얻었다는 게 현실로 증명됐다. 중국 국가통계국과 상무국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의 상품 수출입 총액은 2001년 4조2183억6000만 위안에서 2017년 27조7923억 위안으로 7배 가까이 늘었다. 대외 무역으로 인한 직·간접 취업자 수는 1억8000만명 내외로 중국 총 취업자 수의 23%를 차지했다. “개방이 확대되면서 중국은 국제 분업 협력 및 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됐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됐고 ‘세계의 시장’을 향해 전환했다. 현재 전세계 400여 개 주요 수출상품 가운데 22%가 중국이 1위를 차지하는 상품이다. 중국과 무역을 하는 220여 개 국가 및 지역 가운데 중국은 176개 국가 및 지역의 제1대 무역 파트너다.”

웨이젠궈는 중국은 WTO의 ‘거인’으로 일거수 일투족이 주목받는다고 말했다. 때문에 WTO 가입 후 중국은 세계화에 융합되는 동시에 호리공영(互利共赢, 상호이익과 공동번영)과 공동 발전 모색 원칙을 견지했다. 웨이젠궈는 중국-아프리카 협력포럼 제2회, 3회, 4회의 중국측 주석을 맡았다. “아프리카 국가와의 협력은 모두 실무적이고 호혜적이었다. 우리는 상대가 제시한 시급한 수요에 주목했다. 포럼 정신에 따라 우리는 아프리카에 교육센터, 항(抗)말라리아센터, 학교를 여럿 지었고 농업시범단지 30개를 건설했다.” 

중국과 아프리카의 무역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웨이젠궈는 소위 ‘신 식민주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했다. “아프리카 투자는 무슨 자원 약탈 같은 게 절대 아니다. 앙골라에 공장을 건설한 것은 석유 수입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발전소, 정유공장, 업·다운스트림 공업 건설도 원조해 현지의 일자리를 창출했고 상대국의 재정수입을 늘렸으며 그들의 수출 확대를 도왔다. 무역 측면을 살펴보면 우리는 아프리카에서 광산물, 원유, 철광석, 황산염, 망간, 목재, 목화만 수입한 게 아니라 그들의 완제품, 농산품도 수입했다. 이것은 아프리카에게 큰 지원이 됐다.”

2011년 5월 31일, 한국투자설명회가 베이징에서 개최됐다. 웨이젠궈 상무부 전 부부장이 설명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 VCG

‘일대일로’와 자유무역시험지구는 ‘개방의 3단계’
2008년 웨이젠궈는 상무부에서 퇴직했다. 이듬해 그는 중국국제경제교류센터 비서장에 취임했다. 이곳에서 그는 벌써 10년째 근무하고 있다. 10년 동안 그는 중국이 개방을 확대하는 새로운 단계를 목도했고, 그 가운데 특히 최근 5년 동안의 성과가 가장 눈에 띈다고 말했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를 제시했다. 웨이젠궈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실크로드기금을 연구하고 추진했다. “선전특구 설립이 중국 개방의 첫 번째 창구를 열었고, WTO 가입이 중국을 개방의 두 번째 계단으로 올려놨다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중국 개혁개방의 3단계를 열었다.”

웨이젠궈는 ‘일대일로’ 이니셔티브는 앞선 두 차례 개방과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우선 중국의 개방이 한 방향에서 양방향으로 바뀌었다. 앞선 두 차례 개방은 외국의 자본, 기술, 설비, 관리 등이 중국에 진입한 것이라면, 이번에는 중국의 기술, 설비, 표준, 관리가 해외로 진출한 것이다. 둘째, 앞선 두 차례 개방은 모두 통상 분야의 개방이었다면 이번 개방은 통상, 금융, 서비스, 농업, 문화, 과학기술, 의료 등 분야의 개방으로 전방위적이고 넓은 분야, 높은 수준의 대외 개방이다.” 또한 웨이젠궈는 ‘일대일로’와 앞선 두 차례 개방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일대일로’는 관련 국가를 이익공동체로 묶고, 이익공동체를 통해 운명공동체와 책임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개방에서 우리는 다른 나라들이 중국의 급행열차에 오르는 것을 환영하며, 우리의 개방은 세계화 추진 과정에서 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일대일로’ 건설과 동시에 중국은 외자 경영환경 개선에 주력해 외자 도입에 한층 힘쓰고 있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중국은 12개 자유무역시험지구를 설립했다. 웨이젠궈는 이들 자유무역시험지구는 중국이 개방을 더욱 확대하는 테스트 필드로, 이전 경제특구와 비교해 본질적인 발전을 거뒀다고 말했다. 새로운 자유무역시험지구가 대외 개방 수준이 높은 데다, 정부 정책을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제도 혁신을 바탕으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2013년 8월 22일 상하이(上海)자유무역시험지구가 설립되면서 대외 개방의 새로운 조치가 속속 발표됐다. 그 가운데 상하이자무역시험지구가 처음 실시한 네거티브 리스트 관리모델이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이와함께 사업자등록증과 허가증 분리, 사중사후(事中事後)관리 등도 자리를 잡아갔다.

자유무역시험지구가 축적한 경험은 중국 각지로 전파됐다. 2017년 중국은 처음으로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 리스트를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2018년 7월 28일 새 버전의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 리스트가 전면 시행됐다. 이에 따라 외자 금지 또는 제한 항목이 48개로 줄었고 광산, 제조, 전력, 교통운수, 식량 등 분야의 14개 제한류 업종이 폐지됐다. 나아가 중국 정부는 자동차 제조, 금융, 인터넷 등 분야의 주식 보유비율 제한을 한층 완화했고, 주식 보유비율 제한 시한을 없애겠다고 명시했다. 그는 “자유무역시험지구라는 바탕이 없었으면 새 버전의 외자 진입 네거티브 리스트를 전국적으로 추진하기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8년 들어 중국이 개방을 확대한다는 희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2018년 1월 류허(劉鶴) 중국 중앙재경지도소조 판공실 주임은 2018 세계경제포럼(WEF) 연차총회에서 “올해 중국은 새로운 개혁개방 조치를 내놓을 것이고 일부는 국제사회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웨이젠궈는 국제사회의 예상을 뛰어넘는 조치에는 전세계 최적의 경영환경 조성,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 공정하고 공개적이며 투명한 법치 환경 마련, 자유무역항 건설 모색 등이 포함된다고 설명했다.

“자유무역항과 자유무역지구는 다른 개념으로 전략적 포지션이 다르다. 자유무역지구의 포지션은 ‘테스트 필드’로, 특정 지역에서 전국 각지로 복제 가능한 경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유무역항의 포지션은 아마도 전면 개방의 새로운 고지일 것이다. 자유무역항은 앞으로 5-10년 동안 전세계에서 경영환경이 가장 좋은 개방지가 될 것이고, 앞으로 20-50년 중국 개혁개방의 새로운 분야가 될 것이다. 전세계에서 개방 수준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서 중국은 시장 진입, 금융제도, 세수 등 분야에서도 일련의 특수한 정책을 내놓을 것이다.” 

웨이젠궈는 금융시장 진입 완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수입확대, ‘일대일로’ 건설 강화, 선진 제조업과 현대 서비스업 개방 확대 등이 앞으로 중국의 개방 확대의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의 대외 개방 과정을 되돌아보면서 웨이젠궈는 “중국 발전의 가장 큰 특징은 개방이다. 앞으로도 이것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주석이 여러 장소에서 강조했던 것처럼 중국은 대외 개방의 대문을 더 확대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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