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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세대 영화 감독 딩인난(丁蔭楠), 개혁개방 40년의 산증인


인민화보

2018-07-02      인민화보

중국의 유명 영화감독 딩인난 (미서명 사진은 딩전 제공)

한 영화인이 있다. 그의 창작 인생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궤를 같이한다. 그가 바로 80세 고령의 중국 4세대 영화 감독 딩인난이다. 그는 개혁개방 초기 10년 동안 <봄비가 부슬부슬(春雨潇潇)> <역광(逆光)> <쑨중산(孫中山)> <영화인(電影人)> 등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10여 년 동안 중국 인물 전기 영화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저우언라이(周恩來)> <영원히 함께(相伴永遠)> <덩샤오핑(鄧小平)>을 만들었다. 이후 그는 문화의 거장 루쉰(魯迅)과 치궁(啓功)의 전기 영화도 만들었다.
 
딩인난의 인물 전기 영화는 시간적으로 중국 역사에서 격동의 100년을 관통한다. 그는 시적인 영화 구조, 인간의 영혼까지 스며든 것 같은 묘사로 세계 영화계에 중국 전기 영화의 족적을 남겼고, 대변혁의 시대에 ‘인민의 기억’을 담은 중요한 영상 텍스트를 남겼다. 특히 그는 최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저우언라이>를 통해 중국에 <간디전> <패튼 대전차 군단> <모차르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훌륭한 작품을 남겨주었다.
 
열정의 시대에 대담한 실험과 돌파를 하다
딩인난은 1938년 톈진(天津)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집안이 몰락해 학교에 잘 다니지 못했지만, 연극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톈진여자사범학교의 학생이어서 맹모삼천지교의 정신으로 어린 딩인난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
 
1956년 딩인난은 친척의 소개로 베이징의 한 병원 화학실험원이 됐다. 이 기간 그는 다양한 무대극을 접해 시야가 넓어졌고 무대에 푹 빠져들었다. 1961년 그는 해방군총정연극단(解放軍總政話劇團)과 베이징전영학원(北京電影學院) 두 곳에서 동시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영화는 극이 아니냐? 연극보다 희망이 더 있어”라는 선배의 말에 그는 영화판에서 연극적 이상을 계속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베이징전영학원에 입학했다. 1960년대의 베이징전영학원에서 그는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과 도브젠코의 시화적인 영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 희곡(戲曲), 희극(戲劇), 소련의 시화적인 영화가 딩인난에게 창작의 토대를 마련해주었다.
 
1978년에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국영화의 4세대 감독들이 탄생했다. 딩인난을 중국의 4세대 감독으로 자리잡게 한 작품은 1982년 완성한 <역광>이었다. 영화 곳곳에서 그가 표현 형식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박공장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가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리듬감은 몽타주기법을 빌어 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의도를 보여준다. 딩인난은 “<역광>은 개혁개방 초기 상하이(上海) 판자촌 청년들이 고군분투하고 타락하고 사랑하는 이야기다. 사실 이것은 내 경험이다. 나는 판자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운명을 바꾸려고 애쓰는 주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는 4세대 감독들이 활약하던 시기였다. 딩인난의 <역광>, 양옌진(楊延晉)의 <골목(小街)>, 장놘신(張暖忻)의 <갈매기(沙鷗)>, 황젠중(黃健中)의 <여의(如意)>가 1980년대초 시대의 흐름을 이끌었다.
 
연극평론가 진페이(靳飛)는 “5세대 감독에 비해 4세대 감독들은 매우 전위적인 실험을 했음에도 잘 알려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당시 국제영화제 출품의 길이 순조로웠다면 소시민의 삶을 다룬 현실주의 영화가 자장커(賈樟柯) 감독 전에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84년 개혁개방을 소재로 한 영화 <그는 특구에 산다(他在特區)> 촬영을 마친 딩인난은 의식적으로 인물 전기 영화로의 전환을 시작했다. 당시 딩인난이 일했던 주장(珠江)영화사 대표는 박력 넘치고 생각도 개방적이어서 딩인난이 자신의 생각에 따라 인물 전기 영화 <쑨중산>을 자유롭게 만들도록 했다. “앞의 몇 작품을 통해 영화를 어떻게 찍어야 하는지 알게됐다. 다행히 영화사 대표가 자유로운 창작 여건을 마련해주어 내가 십여년 동안 축적한 것들이 시원스럽게 쏟아져나왔다. 이 영화는 그해 상 8개, 대상 3개를 받았다.”
 
그해 ‘금계상(金雞獎)’ 선정시 많은 평가위원이 이 영화는 서사가 특이하다고 여겼다. ‘금계상’의 경쟁 상대는 3세대 감독 셰진(謝晉)의 <부용진(芙蓉鎮)>이었다. 마지막 투표에서 <쑨중산>이 이겨 딩인난에게 격려와 영감을 주었다.
 
<쑨중산>은 시적인 리듬감과 격식적인 느낌이 강한 영화다. 쑨중산을 중심으로 신해혁명 전후의 피와 살이 살아있는 인물 군상을 담아냈다. 영화 속 황푸(黃埔)사관생들과 광둥상단군(廣東商團軍)의 전투 장면은 사의(寫意)적 방식으로 표현했다. 전장의 격투는 없고 경극의 파오룽타오(跑龍套, 엑스트라) 같은 대열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사라진다. 경극적 사운드와 리듬으로 전투 분위기를 표현하면서 전투를 지휘하는 장제스(蔣介石)의 기질을 두드러지게 했다. 악역인 천중밍(陳炯明)은 뜻을 이루지 못한 영웅으로 그려졌다. 그는 “천중밍이 파면당한 뒤의 모습에는 우페이푸(吳佩孚) 밑에서 일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녹아 있었다”고 회고했다.
 
가오위안둥(高遠東) 베이징대 교수는 중국의 사전(史傳) 전통은 옛부터 지금까지 끊어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쑨중산>을 시작으로 딩인난의 인물 전기 영화는 사전 전통을 의식적으로 영화에 적용했다.
 
1989년, 중국에는 개혁의 바람이 거셌다. 그해 딩인난이 찍은 실험 영화 <영화인>은 삶에 지친 감독이 생존과 창작의 이중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통해 그 시대 중국의 영화산업과 4세대 감독들이 공동으로 직면한 어려움과 고민을 스케치하듯 그려냈다.
 
<역광>이 개혁개방 초기 상하이 소시민 청년의 분투와 방황을 그렸다면, <영화인>은 광저우(廣州) 영화인들이 개혁개방의 중요한 시기에서 빠져나오려는 충동과 초조함을 반영했다. 이 두 작품은 딩인난이 영화 언어 표현 방식에서 탐색의 깊이가 더해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 사회 배경과 사회 의식의 변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영화인>의 대담한 실험성 때문에 이 영화는 <죽음이 삶을 방문하다(一個死者對生者的訪問, Death Visits the Living)> <커피에 설탕 추가(給咖啡加點糖)> 등 당시 다른 영화와 함께 개혁개방 이후의 ‘포스트 모더니즘’ 영화로 분류된다. 심지어 이 영화를 중국의 <8과 1/2>이라고 평가한 사람도 있었다.
 
딩인난의 대표작 포스터 (미서명 사진은 딩전 제공)

<저우언라이>에서 <덩샤오핑>까지
<저우언라이>는 딩인난이 1991년 완성한 인물 전기 영화의 최고작이다. <쑨중산>에서는 ‘내 마음속 쑨중산’을 표현했다면, <저우언라이>에서는 ‘인민의 마음속 저우언라이’를 표현했다. 딩인난에 따르면 이 영화는 수억 인민이 저우언라이에게 받은 인상과 상상과 공명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영화였다.
 
비판 투쟁 대회에서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나 천이(陳毅)를 감싸던 저우언라이, 허룽(賀龍)의 유골안치식에서 7번이나 허리를 굽히며 전우를 보호하지 못한 비통함을 나타냈던 저우언라이, 옌안(延安)에서 간부들과 지역 빈곤의 면모를 하루빨리 바꾸자고 하면서 격앙된 모습으로 건배하는 저우언라이, 아픈 몸을 이끌고 신중국 성립 25주년 경축식이 열리는 인민대회당을 방문해 축사를 하는 저우언라이 등 감정을 고조시키는 장면들이 계속 배치됐다. 끝부분 스리창(十里長街)에서 총리를 보내는 다큐멘터리와 맞물려 영화는 관객들을 단숨에 몰아친다.
 
감정의 카리스마가 수억 중국 관객의 마음을 흔들었다. 통계에 따르면 전국 인구의 1/10이 이 영화를 봤다. <저우언라이>는 딩인난이 배우와 촬영 도구, 장면을 다루는 능력이 비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풍경샷의 편집도 깔끔하고 간결한 대사에는 함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마지막 부분의 세 장면이다. 서화청(西花廳) 밖 눈 쌓인 송백은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형상화하면서도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퉁즈허(筒子河), 자금성 성벽과 각루는 ‘문혁’에서 저우언라이가 차지하는 역사적 지위를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인민대회당의 높이는 국가 정치생활에서 저우언라이의 지위를 상징한다. 화면 외적인 것들도 의미가 깊어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작가 진페이(靳飛)는 경극 미학을 빌어 <저우언라이>의 성공을 분석했다. “딩인난은 인물 전기 영화의 주인공을 경극의 노생(老生)과 아버지 이미지와 동질화시킨다. 노생과 아버지 이미지는 국가와 같은 높은 책임감이고 슬픈 영웅이다.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하는 희생정신이다.” 저우언라이에 대한 딩인난의 인식은 비슷하다. “대다수 중국인은 저우언라이의 마음을 이해한다. 치욕을 참으면서 중책을 맡고 죽을 때까지 싸운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딩인난과 같은 세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첫 작품인 <봄비가 보슬보슬>은 1979년에 완성돼 개혁개방과 발걸음을 거의 같이한다. 1992년 딩인난은 <덩샤오핑>을 구상했지만, 2000년까지 시나리오 작업이 끝나지 않다가 결국 그의 아들 딩전(丁震)이 완성했다. 이 영화는 촬영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봄비가 보슬보슬>에서 2003년의 <덩샤오핑> 개봉까지, 딩인난은 24년 동안 묵묵히 영화의 길을 걸었다.
 
<덩샤오핑>은 인민대회당, 중난하이(中南海), 덩샤오핑 생가, 마오쩌둥(毛澤東) 기념당, 고궁(故宮, 자금성),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사무실 등 실제 장소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가장 어려웠던 것은 톈안먼(天安門) 성루에서의 촬영이었다. 성루에 등을 거는 데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요한 명절이나 기념일에만 등을 걸기 때문에 평상시에 등을 걸면 외부의 추측을 일으키기 쉬웠다. 소형 자동차 200여 대를 톈안먼 북쪽에 세우고 수천 명이 톈안먼 성루에 올라 신중국 성립 35주년 경축식에서의 덩샤오핑 열병 장면을 촬영했다.
 
이 부분의 리듬감은 매우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냈다. 조용한 덩샤오핑 집에서 덩샤오핑이 대문을 나선다. 고요한 징산(景山) 뒷길을 따라 승용차가 톈안먼을 향한다. 우먼(午門) 앞에서 톈안먼까지 검은색 훙치(紅旗) 승용차가 빈 공간에 가지런히 서 있다. 덩샤오핑이 성루에 올라 군중에게 손을 흔들자 광장에서 우뢰와 같은 환호성이 울린다. 이 전과정이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 같다.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다가 마지막에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저우언라이>의 신중국 성립 25주년 기념식과 <덩샤오핑>의 신중국 성립 35주년 기념식에서의 격식과 리듬감의 맞물림은 의미심장하다. 1974년부터 1984년까지, 인민대회당 안에서 톈안먼 성루 위까지, 저우언라이에서 덩샤오핑까지, 그리고 두 번의 국경절 의식까지 딩인난은 시공간의 대응성을 통해 두 명의 역사적 인물의 내적 논리관계와 연관성을 보여준다. 딩인난은 “<저우언라이>를 찍고 다시 <덩샤오핑>을 찍은 것은 운명으로 정해진 일이었다. 나는 저우언라이가 다 이루지 못한 일을 덩샤오핑이 이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화 <치궁>의 크랭크인 현장에서 총감독 딩인난과 아들인 딩전 감독의 모습. 영화는 2015년 개봉됐다. (미서명 사진은 딩전 제공)

정치인물에서 문화인물로, 혁명에서 문화로
문화는 100년 중국사에서 보다 큰 관심을 가질 가치가 있는 분야다. <덩샤오핑> 이후 딩인난 부자는 중국의 ‘문화 거장’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2005년 완성된 <루쉰>은 딩인난 작품의 이중 전환을 이뤘다. 첫째는 소재 전환으로, 정치 인물에서 문화 인물로 바뀌었다. 둘째는 주제 전환으로, 혁명에서 문화로 바뀌었다. 마침 루쉰은 혁명성과 문화성 두 가지를 다 갖춘 인물이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까지 중국에서는 루쉰을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다. 어떤 각도로 그릴 지가 무척 고민스러운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딩인난은 생활인 루쉰에서 시작해 가정과 아버지의 시각으로 루쉰의 사회 활동을 담아냈다.
 
딩인난은 루쉰의 마지막 3년 상하이 생활로 영화적 시간을 설정했다. 영화 전편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었다. 영화에서는 양싱포(楊杏佛)의 죽음과 취추바이(瞿秋白)의 죽음을 묘사하다가 마지막에 루쉰의 죽음을 그린다. 주관적 화면과 초현실적인 화면은 죽음으로 인해 살아있는 사람이 느끼는 심리적 갈등이 느껴진다.
 
딩인난의 인물 전기 영화는 주인공의 사별에 줄곧 관심을 기울인다. 특히 밤낮의 전환을 통해 음양이 변화하는 과정을 완성한다. <저우언라이>에서 병실 커튼을 열고 닫는 것이 그렇고, <치궁>에서 죽은 아내 바오천(寶琛)에게 ‘대비주(大悲咒)’를 낮에서 밤까지 읊어주는 것도 그렇다.
 
죽음에 대한 묘사는 과거 중국 영화에선 피했던 소재다. 그러나 딩인난은 작품에서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필름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저우언라이>와 <루쉰>에서 집중 사용됐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나”라고 말했던 저우언라이와 “암흑의 수문(水門)을 어깨로 걸머질 테이니 젊은이들은 넓고 밝은 곳으로 나아가라”고 한 루쉰, 한 명은 혁명가이고 한 명은 문학가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모두 동양문화의 ‘제세자비(濟世慈悲)’의 마음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조용하게 처리했고, 차분함을 통해 생사에 대한 깊은 생각을 반영했다. 그럼으로써 해당 인물의 전기 영화를 배려의 긍극적 경지로 도달시켰다.
 
2017년 딩인난 부자가 완성한 신작 <치궁> 타이틀에는 ‘이 영화를 평범하지만 위대한 선생님들께 바칩니다’라는 자막이 있었다. 이제까지의 주인공과는 달리 치궁은 서예 대가이긴 하지만 공명과는 거리가 먼, 동네에서 부침을 거듭한 평민이자 평범한 교사였다.
 
어떤 이유로 이렇게 큰 전환을 했냐는 질문에 딩인난은 “100년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육가는 정말 강인했고 중국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다. 서남연합대학교(西南聯大) 사람들은 죽음을 불사한 희생정신을 발휘해 중국에 수많은 인재를 양성해주었다. 내가 치궁을 영화화한 이유는 한 교육자를 통해 민족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딩인낭은 치궁의 일생은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 민국시기의 중국, 항일전쟁 시기의 중국, 신중국 성립 이후의 중국, ‘문혁’ 시기의 중국,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단계를 모두 꿰뚫는다고 말했다. 치궁을 가르친 사람과 치궁이 가르친 사람, 한 세대 또 한 세 대의 교육이 연결돼 중국 문화가 면면이 이어졌다.
 
이 영화는 딩인낭이 총감독을 하고 딩전이 감독한 부자 두 사람의 작품이다. 영화 전체의 시대감에서 노장 딩 감독과 신진 딩 감독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자체가 스타일화된 ‘딩 씨 영화 문화’의 교육과 전승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극의 대가 메이란팡(梅蘭芳)은 중국을 넘어 옛 소련과 미국, 일본에 경극을 알렸고 세가지 표현 체계를 수립했다. 딩인난은 앞으로 자신의 40년 영화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해 동안 지녀온 숙원을 이루고 싶다고 밝혔다. 즉 자신의 인물 전기 영화에서 영화와 경극을 융합시켜 메이란팡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는 것이다.
 
 

글|왕중이(王衆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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