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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젠(李健), 중국 고등교육 발전사의 산증인


인민화보

2018-05-21      인민화보

2013년 5월, 정협위원 겸 베이징이공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원장인 리젠은 한국과학기술원 인공위성연구센터를 방문했다.사진/리젠 본인 제공

올해 54세인 리젠은 후난(湖南)성 화이화(懷化) 즈장(芷江) 동(侗)족 자치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소수민족이 모여사는 산간벽지다. 오랫동안 외지에서 공부하고 일한 그는 지혜와 학식을 겸비한 학자가 됐다. 현재 그는 전국정협위원, 베이징(北京)이공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는 공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변한 경험을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경험에서 중국의 교육이 낙후된 상태에서 어떻게 선진화됐고, 폐쇄적인 상태에서 어떻게 개방됐는지 까지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2011년 10월, 리젠은 베이징이공대학교를 대표해 미국 컬럼비아대학교를 방문했다. 사진은 방문기간 리젠은 컬럼비아대학교 관련 책임자와 학생 공동 육성 등에 관해 토론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리젠 본인 제공

대학입학시험(高考)이 운명을 바꾸다
리젠의 어머니는 고향의 한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버지는 후난성 안장(安江)농업학교에서 일했다. 그 시대, 특히 폐쇄되고 낙후된 산간지역에서 그는 ‘지식인 가정’ 출신인 셈이었다. 어릴때부터 그는 부모님의 지도와 훈육으로 생각이 트이게 됐고 지식과 공부에 흥미가 생겼다.
 
리젠의 향학의 길에는 극적인 면이 많았다. 그가 10대 초반이던 시절에도 지식청년의 ‘상산하향(上山下鄉, 문화대혁명 후기 도시 청년을 농촌과 산간벽지로 보내던 운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었다면 그도 평생 이 폐쇄된 산간지역에서 남은 생을 보낼 터였다. “부모님은 내가 산간지역에서 계속 살기를 바라진 않았다. 나도 어렸지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당시 각 현(縣)에는 문예단이라는 중국 전통극 극단이 있었고 해마다 어린이를 모집해 배우로 육성했다. 늘 ‘산을 벗어나고’ 싶었고, 지식청년은 농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운명’을 바꾸고 싶은 리젠 가족은 그를 현 문예단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문예단에 들어간 그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앞으로 문예산업에 종사하기 위해 극단에서 춤 같은 기본기를 배웠다. 하지만 13살이 되던 해 그의 인생이 크게 바뀌었다.
 
2017년 1월 21일, 제7차  ‘수도 교육계 10대 뉴스인물’ 수상식이 베이징방송국에서 열렸다. 리젠은 ‘의무교육을 받고있는 농촌 학생의 영양 개선’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해 중요한 공헌을 했기 때문에 ‘수도 교육계 10대 뉴스인물’로 뽑혔다. 사진/리젠 본인 제공

1977년 리젠이 13살 되던 해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하는 중국 신(新)시기 과학적 교육 작업이 시작됐다. 이 해 10년 동안 중단됐던 대학입학시험 제도가 부활돼 지식청년들에게 신시기의 첫 번째 서광을 비춰주었고, 중국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리젠은 “지식청년이 ‘상산하향’하던 시대에 중국 인구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유입됐지만, 대학입학시험이 부활되자 인구 이동이 역전됐고, 청년들에게 발전의 공간과 기회가 생겼으며, 도시도 번화해졌다”라고 그때를 회상했다. “상산하향의 시대에는 베이징에 갈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후난성 성도인 창사(長沙)로 많이 갔다. 나는 1982년 후난사범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때 처음으로 화이화를 떠났다. 1988년 베이징이공대학교 석사과정에 합격해 베이징에서 공부하게 됐다. 대학입학시험이 나에게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두 번이나 주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을 말하면서 리젠은 “대학입학시험이 개혁개방 시기 중국의 핵심역량을 양성했다. 그들은 모두 대입시험 고사장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대입시험 제도 부활을 통해 사회 전체에 지식과 인재를 중시하는 풍조가 다시 형성됐다. 그때 대입시험을 부활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중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등교육 산업화의 산증인
1991년 3월 리젠은 베이징이공대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 남아 일했다. 1995년 9월 그는 런민(人民)대학교 상학원(경영대학원)에 들어가 산업경제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이 기간  그는 중국 고등교육의 큰 변화를 목격했다.
 
90년대 전까지 중국은 대학입학시험을 시행하긴 했지만 합격률이 매우 낮았다. 경제가 발전하고 취학 적령기 청년이 늘어나면서 고등교육 규모가 중국 사회와 경제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98년 아시아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중국 경제에 하행 압력이 나타났고 내수 확대가 시급해졌다. 동시에 중국은 국유기업 개혁에 나서 많은 인력이 취업시장으로 몰려들었고, 취업 적령기 청년 숫자도 높은 수준을 유지해 취업 압력이 갑자기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11월, 탕민(湯敏) 아시아개발은행 주(住)베이징 대표처 수석경제학자가 개인 명의로 중앙정부에 서신을 보내 고등교육기관의 모집정원을 확대해달라고 제안했다. 같은 해 12월, 중국 교육부는 <21세기를 향한 교육 진흥 행동계획(面向21世紀教育振興行動計劃)>을 발표하고 ‘2010년까지 교등교육 규모를 크게 확대해 입학률을 15%선으로 늘리고, 일부 대학과 중점 학과를 세계 일류 수준으로 발전시킨다’고 천명했다. 1999년 6월 1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교육 개혁 심화 소양 교육 전면 추진에 관한 결정(關于深化教育改革全面推進素質教育的決定)>을 발표하고 ‘여러 형태를 통해 고등교육을 적극 발전시켜 2010년까지 중국의 취학 적령기 인구의 고등교육 입학률을 현재의 9%에서 15% 내외로 높인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중국의 대학교는 공식적으로 모집정원을 확대해 비약적인 발전의 길을 걸었다. 당시 이같은 비약적 중국 교육 발전의 축소판이었다.
 
“그때 대학의 모집정원이 크게 늘었다. 그전까지 베이징이공대학교는 1년에 1300명을 뽑았는데 이후 4000명까지 늘었다.” 리젠은 “모집정원 확대 이후 교수가 매우 부족했다. 나는 1개 반을 가르치다가 3개 반을 가르치게 됐고, 신규 과목 개설 준비도 해야 했다. 당시 교수 일은 매우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통계에 따르면, 1998년 중국 대학의 모집정원은 180만명이었지만, 1999년 모집정원이 47% 확대됐고, 이후 3년 동안 각각 25%, 17%, 10%씩 확대됐다. 2002년 중국의 고등교육 총 입학률은 15%에 달했다. 이때부터 중국은 국제적으로 공인된 고등교육 대중화 단계로 진입했다. 리젠은 “2016년 중국의 고등교육 총 입학률은 42.7%에 달했다. 중국 인구를 고려하면 이는 세계 고등교육사상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보다 많은 중국 청년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자기 발전을 할 수 있도록 했을뿐 아니라 중국 경제 발전과 사회 진보에도 큰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고등교육 규모가 빠르게 확대된 동시에 중국 고등교육의 수준 향상과 중점 학과 양성도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5년 11월 국무원 비준을 거쳐 국가계획위원회, 국가교육위원회, 재정부가 공동으로 < ‘211공정(21세기를 맞아 100개 내외의 중점 고등교육기관 및 중점 학과 양성 공정)’ 전체 건설 계획(211工程(面向21世紀,重點建設100所左右的高等學校和一批重點學科的建設工程)總體建設規劃)>을 하달해 ‘211공정’이 공식 시작됐다. 이에 더해 중국 교육부는 베이징대학교, 칭화대학교 등 고등교육기관을 수준 높은 세계 일류대학으로 발전되도록 중점 지원했다. 이를 ‘985공정’이라고 한다. “‘211공정’과 ‘985공정’은 중국 고등교육기관 분류를 바꿔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중점대학과 비 중점대학으로만 분류했지만, 이후에는 학생들의 응시에서나 졸업 후 기업의 직원 모집에서나 ‘211’과 ‘985’ 대학을 중요시하게 됐다.”
 
2015년 중국의 고등교육에 ‘쌍일류(雙一流)’라는 또 하나의 국가 중점 건설 공정이 생겼다. 2015년 국무원은 <세계 일류대학과 일류학과 건설 통합 추진의 전체 방안(統籌推進世界一流大學和一流學科建設總體方案)>을 발표하고, 공인된 국제표준에 따라 대학과 학과를 개설하고 국제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지표에서 일류에 도달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2017년 1월 ‘쌍일류’ 공정이 전면 시행됐고, 베이징이공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원장인 리젠도 이 공정에 참여했다. “이 공정이 시행된 이후 베이징이공대학교는 1년 여의 시간을 들여 각 학과를 두루 포함하는 ‘쌍일류’ 건설 계획과 중점 건설 학과군을 제정했다. 현재 우리 학교의 3개 학과가 교육부 중점 건설 학과군에 들어갔다. 앞으로 우리는 발전 계획을 차근차근 시행할 것이다.”
 
2016년 11월 26일, ‘제2차 중국 식품기업 사회적 책임 연례회의 겸 제1차 중국 식품 학원연맹 고위급 포럼’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 포럼에서 리젠은 베이징이공대학교 사회적 책임 연구센터를 인솔해 작성한 <2016 중국 식품기업 사회적 책임 보고서>를 공식 발표했다. 사진은 리젠과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부 학생들 모습이다. 사진/리젠 본인 제공

사회에 봉사하기 위해 연구한다
1996년부터 일을 시작한 리젠은 주로 베이징이공대학교에서 MBA(경영관리학 석사) 과정을 지도했다. 미국 MBA는 100여 년의 역사가 있고, 그 동안 미국에 수많은 우수한 경영관리 인재를 제공해 미국 경제 발전의 신화와 기적을 창조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MBA는 도입된지 겨우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아 고민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베이징이공대학교는 공과대학으로 유명한 학교로 ‘산학 결합’ 분야에서 이름이 높았다. 나는 주로 경제 관리 분야를 가르치고 연구했지만 ‘산학 결합’을 통해 학생과 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싶었다.”
 
2006년 리젠은 기업 경영전략 관련 학술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았다. 때마침 중국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보편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2008년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2008년 중국에 원촨(汶川)대지진이 발생했다. 이때 수많은 기업의 기부금이 사회의 기대에 못미쳐 불만이 쏟아졌다. 또한 이 해 언론은 식품 안전 문제를 잇달아 보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핫이슈가 됐다. “2008년 사람들은 식품 안전과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문제를 야기한 당사자가 바로 기업이었고, 기업의 생산과 오염물 배출 단계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나는 기업, 특히 상장기업의 사회적 책임 분야를 연구하기로 생각했다. 중국의 우수한 기업은 절대 다수가 상장기업이었고 그들의 태도가 곧 중국 기업의 풍향계였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가 대중의 주목을 받고 기업들이 자신의 책임을 잘 이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사회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2010년부터 리젠은 이 연구를 시작했다. 2년 뒤 리젠은 이 연구에 학생들을 참여시켰다. “학생들을 참여시키는 것이 학교가 인재 양성을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현재 많은 우리 학교 출신 학생이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재학 기간 중에 학생들에게 사회적 책임을 의식적으로 가르쳤기 때문에 앞으로 그들과 그들이 몸담고 있는 기업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리젠이 이끄는 베이징이공대학교 사회적책임 프로젝트팀은 중국식품신문사와 협력해 수많은 현지조사와 연구를 한 끝에 중국 최초의 중국 식품기업 사회적 책임 평가기준을 마련했다. 이 평가기준은 정부 부처와 사회적 책임 연구기관에 채택됐다. 2016년 1월 22일 ‘제1회 중국 식품기업 사회적 책임 연례회의’에서 프로젝트팀은 <2015 중국 식품기업 사회적 책임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후 프로젝트팀은 해마다 지난 1년 동안 식품기업의 사회적 책임 보고서를 발표했고, 벌써 3년이 됐다.
 
“중국의 대학에겐 인재 양성, 과학적 연구, 사회 봉사, 문화 전승, 국제 교류라는 5개 직능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앞의 3개 직능을 포함한다. 연구는 매우 부담스럽지만 이 프로젝트를 계속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중국 고등교육의 국제화를 직접 경험하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고등교육을 발전시키면서 서방 선진국의 경험을 많이 배우고 참고 했다. 그래서 대외 교류와 협력이 각 대학의 주요 과제였다. 리젠은 2004년 처음으로 방문학자 신분으로 미국의 4대 공과대학 중 하나인 일리노이 공과대학교에서 공부하고 교류했다. “미국 동료들은 중국의 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았고 중국에 대한 인상이 전반적으로 좋았다. 하지만 당시 우리는 연구비가 부족해 학교의 혁신력이 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의 협력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뒤 상황이 바뀌었다. 2008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영미 등 국가의 대학이 속속 연구비를 삭감했다. 반면 중국의 교육 투자는 오히려 계속 늘어났다. 2012년 중국의 재정 성격의 교육비가 처음으로 2조 위안(약 342조8800억원)을 돌파해 역시 처음으로 국내총생산(GDP)의 4%를 넘었다. 이후 이 비율은 5년 연속 4% 이상을 유지했다. “중국 경제는 중고속 성장세를 유지했고 교육 지출 비율도 줄지 않았다. 현재 중국의 대학은 해외 대학에 비해 연구비가 풍부한 편이다. 지금 우리가 다시 영미 국가 대학들과 교류를 추진하면 그들은 매우 흔쾌히 우리와 협력할 것이다. 그들은 더 많은 중국 학생이 그곳에서 공부하길 바란다. 그래야 그들에게 수입이 생기고, 게다가 중국 학생이 열심히 한다는 것을 그들도 인정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연구비가 넉넉하다는 것을 알고 우리와 프로젝트를 하고 싶어한다.”
 
리젠은 유학으로 대표되는 국제화는 오래전부터 시작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학생들의 이동 방향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중국 학생이 해외에 나가 공부했다. 2006년 핀란드에 갔을 때 영하 18도가 되는 곳에서도 중국인 유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정말 감개무량했다.” 하지만 이후 리젠은 중국 학생이 유학을 가는 것보다 외국 학생이 중국으로 유학오는 경향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2013년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일대일로(一帶一路)’ 이니셔티브를 제창한 이후 중국으로 오는 외국인 유학생 수가 빠르게 늘어났다. 현재, 베이징이공대학교에 다니는 유학생은 2200여 명에 달하고 그 중,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 가장 많다. 나머지 학생들은 파키스탄, 인도, 아프리카 등 ‘일대일로’ 연선국가에서 온 학생들이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2016년말 기준 중국은 188개 국가 및 지역과 교육 협력 및 교류 관계를 맺었고, 46개 주요 국제조직과 교육 협력 및 교류를 진행하고 있으며, 47개 국가 및 지역과 상호 학위 인정 협의를 체결했다. 2016년 중국에 온 외국인 유학생 수는 44만3000명에 달해 2012년 대비 35.1% 증가했다. 중국은 아시아 1위, 세계 제3대 유학 목적국이 됐다.
 
중국 고등교육 발전 추세에 대해 리젠은 중국의 고등교육은 교육의 질 향상 분야에서 더 큰 진전을 거둘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몇 년 동안 ARWU, QS, THE 등 세계 대학교 순위에서 중국 대학의 순위가 계속 올라갔다. 이를 통해 중국의 고등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주로 연구력과 인재 양성 능력, 국제화 수준 향상 등에서 나타난다. ‘쌍일류’ 건설이 시작된 만큼 중국의 고등교육도 새로운 고품질 발전의 시기를 맞을 것이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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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예술교류’ -중한 유명교수 2인의 공동 도자기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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