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궈하오(郭浩), 반평생을 中 친환경 농업에 바친 선구자


인민화보

2018-04-02      인민화보

궈하오, 차오다현대농업그룹·차오다 취안추츠(全求吃)그룹·차오다농업자원과학기술그룹 주석, 중국농업산업화 선두기업협회 부회장, 중국 농촌 1·2·3차 산업 융합발전연맹 집행위원장, 중국 채소유통협회 1·2·3차 산업 융합발전분회 회장 사진/차오다그룹 제공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농업 발전 분야에서 차오다(超大)그룹의 궈하오 주석은 원로급 인사라고 할 수 있다. 1955년생인 궈하오는 군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8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1969년 14세에 입대했고, 이후 시골 산골짜기의 한 공장에 배치돼 집적회로 연구개발 및 생산에 종사했다. 1982년, 개혁개방 초기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고 홍콩으로 건너가 군수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국유기관에서 처음으로 퇴직해 사업을 시작한 선구자가 됐고, 개혁개방 이후 ‘눈을 뜨고 세계를 본’ 첫 번째 사람들이 됐다.

국제교류를 통해 궈하오는 당시 중국 농업이 취약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부터 그는 농업 관련 분야를 연구했다. 1994년부터 현대 농업 개발 참여에서 1997년 첫 번째 차오다현대농업생산기지 개척까지, 다시 1999년 차오다현대농업전략연구소 및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에 이르기까지, 궈하오는 자신의 동료, 직원들과 함께 중국 친환경 농업 발전의 길에 올라 20여 년 동안 전진했다.

차오다 저우닝(周寧)기지는 푸젠성 닝더(寧德)시에 위치해 있다. 사진/차오다그룹 제공

농업은 ‘바다처럼 깊다’
1978년 겨울, 안후이(安徽)성 펑양(鳳陽)현 샤오강(小崗)촌의 농민 18명이 ‘감히 세상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다(敢爲天下先)’는 정신으로 ‘농토를 각 가정에 나눈다(分田到戶)’는 비밀 계약에 지장을 찍고, 농업 전면 도급제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 농촌 개혁의 서막이 열렸다.

1982년부터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3농(三農, 농업, 농촌, 농민)’ 1호 문건 5건을 연달아 하달해 농가 세대별 생산책임제(包産到戶)의 합법성, 농촌 상공업 제한 완화, 유통채널 활성화, 산업구조 조정, 국가 일괄수매· 일괄판매 폐지, 농업 투자 확대, 및 공농(工農)·도농(都農)관계 조정 등의 과제를 완료했다.

그러나 1987년에서 2003년까지 중앙 1호 문건은 더 이상 ‘3농’에 주목하지 않았고, 중국 경제의 중심도 공업과 도시 발전으로 전환됐다. 이 기간은 중국 농업이 발전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이며, 궈하오가 뜻을 바꾼 시기기도 하다. 1994년 궈하오는 현대 농업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의 첫 행보는 해외의 우량 품종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해외에서 사업을 하면서 해외에서는 먹을 수 있는 채소가 대륙에는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나는 농업부와 소통해 이들 품종을 국내에 들여와 직접 연구·개발을 했다. 전국 각지의 다양한 기후대에서 채소를 연구개발해 가장 우수한 품종을 확정하고 다시 시장에 내놓아 보급·판매했다.”

이때부터 궈하오의 농업 분야가 확대돼 처음의 재배업에서 목축업으로 확장됐다. 당시 그는 중국 젖소 한 마리당 평균 우유 생산량은 4톤도 안 되지만 유럽 젖소는 평균 7톤을 생산하고, 미국은 10톤을 생산한다는 것을 알게됐다. “나는 세계 클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양샹중(楊向中)에게 연락했다. 그를 통해 세계 100위권 숫소의 정액을 국내로 도입해 중국 암소를 수정시켰다. 또한 해외에서 생산량이 높은 젖소 품종을 들여왔고, 농업부와 공동으로 ‘보얼 산양’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궈하오는 농업의 토양오염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은 화학비료를 많이 사용해 토양이 오염돼 땅이 딱딱하게 굳는 현상이 심각했다. 그래서 그는 유기비료 사업을 시작했다. “우리는 우선 바이오 유기비료부터 시작해 인세균, 질소고정박테리아를 연구했다. 이를 위해 나는 타이완(台灣)의 유기비료 공장을 인수했고, 그곳의 균종과 우리가 가진 것을 접목한 다음 국내 우수한 바이오 전문가를 초빙해 인산용해균, 칼륨 박테리아를 정제하고 생장성을 향상시켰다. 이것을 추출한 후 기술을 이용해 생장성을 향상시키면 군주가 보다 강해진다. 이후 농업부는 바이오 유기비료 표준을 유기비료 1g당 인산용해균, 칼륨 박테리아, 질소고정박테리아 함량 2000만 이상으로 제정했다. 당시 차오다그룹이 정제와 생장성 향상을 통해 생산한 유기비료의 1g당 인산용해균, 칼륨 박테리아, 질소고정박테리아 함량은 약 7000-8000만이었다.”

2000년, 차오다그룹은 홍콩증권거래소에 상장해 중국 농업의 국제자본 운영의 새 장을 열었다. 또한 그 해에 궈하오는 그룹 대회에서 자신의 꿈을 이렇게 밝혔다. “건강한 식품은 부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국민이 저렴하고 질 좋은 식품을 먹도록 해야 한다. 부유한 생활도 도시인 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든 농민이 행복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농업에 종사하는 목표이고, 내가 평생을 바쳐 추구하는 ‘차오다멍(超大夢, 거대한 꿈)’이다.”

2017년 1월 19일, 궈하오는 푸젠성의 융타이(永泰)현, 셴유(仙遊)현, 구톈현, 핑난(屏南)현과 ‘농업 공급측 구조개혁 공동추진 전략 협력 협의’를 체결했다. 사진/차오다그룹 제공

‘식품 안전’이 최우선 과제
차오다그룹 창립 초기, 궈하오는 식품 품질안전이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이는 차오다그룹 사람이라면 절대 위반해서는 안 되는 ‘고압선’이고, 차오다그룹이 친환경 농업을 발전시키는 지향점이다. 이 규칙 하에 차오다그룹은 설립 때부터 검측센터를 설립했고, 이후 품질통제센터를 설립하는 등 품질을 차오다의 ‘생명선’으로 삼았다.

식품 안전을 이야기하면, 궈하오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예전에 한 당부를 잊을 수가 없다. 2001년 7월 당시 푸젠(福建)성 성위원회 부서기이자 푸젠성 성장이었던 시진핑 주석은 차오다그룹의 푸젠성 유시(尤溪)현 탕촨(湯川)기지를 시찰했다. “당시 시 성장은 많은 당부를 했다. 특히 ‘식탁 오염’을 잘 관리해야 하며, 도농 주민이 안심하고 채소를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시민의 ‘식탁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궈하오의 차오다그룹은 업계 최초로 과일과 채소 제품에 생산 전과정 관리감독 제도를 도입했다. 즉 시장에 출시되는 제품에 ‘신분증’을 부착한 것이다. 신분증에는 ‘생산기지 이름, 품명, 로트번호, 수확자, 수확 시간’ 등 정보가 기록돼 추적 관리가 가능하다. “우리는 관리감독 과정에서 ‘기지 당 코드 한 개와 파일 한 개를 부여하는’ 관리 모델을 시행했다. 제품 생산 로트번호를 통해 해당 기지의 파일을 찾을 수 있고, 해당 채소의 경작 기록, 약품 사용 기록, 운송 과정, 원료 검수 기록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과일과 채소의 ‘토지’에서 ‘식탁’까지의 매 단계가 생산 기준에 부합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다.”

엄격한 품질 관리는 차오다그룹에 대한 인정으로 되돌아왔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국가질감총국과 농업부 등이 진행한 20여 차례의 샘플검사에서 차오다그룹 제품의 합격률은 100%를 기록했다. 2008년 차오다그룹은 베이징(北京)올림픽·패럴림픽의 공식 채소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2017년에는 샤먼(廈門) 브릭스 정상회담의 채소 핵심 공급업체로 선정됐다.

궈하오는 “우리에게 식품 안전은 생명력”이라며 “얼마 전 19차 당대회에서 ‘식품안전 전략을 대대적으로 시행해 인민들이 안심하고 먹게 하겠다’고 천명했다. 이는 우리가 오래 전부터 계속 견지해온 목표이고, 앞으로도 이 목표를 향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차오다 현대화 육묘공장 및 그곳에서 생산된 친환경 작물 사진/차오다그룹 제공

새 시대, 중국 신농업을 경작하다
개혁개방 이후 ‘3농 문제’는 늘 중국공산당과 중국 정부의 관심의 초점이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은 ‘3농 문제’에 관한 1호 문건을 하달하고 중국 농업 발전에 방향을 제시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 전체 인구에서 농민은 절대적 비율을 차지했다. 그러나 농민의 평균 생활수준은 전국에서 가장 낮은 편이었고, 농민의 1인당 평균 수입 증대 성과도 크지 않았다. 그래서 중단된지 10여 년 만인 2004년에 1호 문건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4년 중앙 1호 문건이 농업을 새롭게 주목한 이후 농업 발전에 유리한 정책이 속속 발표됐다. 2005년 10월 중국공산당 16기 5중전회에서 ‘생산 발전, 생활 풍족, 향촌 풍속 문명, 깨끗한 도시 면모, 민주 관리’의 요구를 제시해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2006년 1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례>가 폐지돼 중국 농민은 2600년 동안 지속된 ‘황량국세(皇粮國稅, 황제가 농민에게 징수하는 세금 형식의 양식)’ 시대를 마감했다.

18차 당대회 이후 중국공산당은 ‘3농’ 문제 해결에 새로운 의견을 내놨다. 2015년 11월 3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민 경제 및 사회 발전의 제13차 5개년 계획 제정에 관한 건의(中共中央關於制定國民經濟和社會發展第十三個五年規劃的建議)>를 발표하고, ‘샤오캉(小康)사회의 전면 건설’을 제시했다. 2015년 11월 27-28일 열린 중국 중앙빈곤지원개발 업무회의에서 시진핑 주석은 ‘빈곤 탈출 승리를 위한 공격전을 계속할 것’을 제시했다. 이 두 소식에 궈하오는 매우 흥분했다. 궈하오는 “30여 년의 개혁개방을 거쳐 우리는 전반적인 샤오캉을 실현했다. 하지만 전면적인 샤오캉과는 아직 거리가 있다. 일부 지역의 경우 혜택이 두루 돌아가는 발전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3농’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며, 이는 또한 우리가 계속 주목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국가 농업 산업화의 중점 선두기업을 이끌고 있는 궈하오는 늘 빈곤 지원의 길에 서 있었고, ‘하나라도 빼놓을 수 없다’는 빈곤 탈출 목표를 위해 노력했다. 푸젠성 자오안(詔安)현에서 네이멍구(內蒙古) 둬룬(多倫)현까지, 다시 허베이(河北) 바상(壩上)에 이르기까지, 궈하오와 차오다그룹은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현재까지 차오다그룹은 10만호에 가까운 농가를 부유하게 만들었다.

2015년 11월, 중앙경제업무회의가 공급측 구조개혁을 제시했다. 동시에 시진핑 주석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회의에서 ‘빈곤 탈출 공격전 시작’ 구호를 제시했다. 여기에서 궈하오는 균형있고 체계적인 농업 발전과 빈곤 지원을 결합한다는 새로운 사명을 발견했다.

궈하오의 구상은 앞으로 중국의 모든 현(縣)을 하나의 생산 단위와 공급 단위로 만들어 벌집 모양의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런 모델은 그 성(省)에서 생산된 물건을 해당 성에서 최대한 판매하고, 부족하면 다른 성에서 조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생산관리가 체계적으로 변할 것이다.”

이 모델을 지원하는 기술은 이미 구현됐다. 현재 차오다그룹은 블록체인기술을 기반으로 한 더블 폐쇄고리 관리시스템을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품질 추적 관리 시스템’과 ‘스마트 농장 관리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이 시스템을 열면 효율적으로 전체 년도 수요를 볼 수 있다.

“차오다그룹 홈페이지에는 작게는 중국의 현에서 크게는 전세계까지 지역이 3가지 색으로 표시된다. 하나는 농작물을 갓 파종했다는 표시이고, 하나는 현재 작물을 생산하고 있다는 표시이며, 또 하나는 작물을 수확 완료했다는 표시다. 이런 데이터와 분류를 통해 우리는 각 지역, 더 나가 중국 전체 인구의 음식 구조를 알 수 있고, 맞춤식 생산 재배를 할 수 있다.”

2017년, 궈하오는 푸젠성 구톈(古田)현에서 이 모델을 시험했다. 현지 빈곤 지원 사업에 큰 기여를 해서 차오다그룹은 구톈현 정부와 푸젠성 정부로부터 감사 서신을 받았다. “우리의 이 모델은 상당한 성공을 거뒀다. 다른 지역에서 우리는 일부 프로젝트를 중단하려 했지만 현지 농민들이 반대하면서 꼭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에겐 농민이 잘 받아들여준 것도 일종의 성공이다.” 궈하오는 소망이 있다고 했다. “내 평생 소망은 앞으로 농업부와 우리 같은 농업기업이 이 중요한 과제를 함께 해내는 것이다.” 
 

글|장진원(張勁文), 천징첸(陳敬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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