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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청칭(黃澄清), 중국 통신·인터넷 발전에 평생을 바치다


인민화보

2018-03-06      인민화보

황청칭 중국인터넷협회 부이사장  사진/마겅핑(馬耕平)

중국인터넷협회 사옥에서 황청칭 협회 부이사장을 만났다. 올해로 61세. 그러나 청년 못지 않은 총기와 활력은 그의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며 그는 자주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40년 경력의 노련함과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성격을 느끼게 하는 웃음소리였다.
 
황청칭의 인생은 꽤나 드라마틱하다. 1977년 가오카오(高考, 대학수학능력시험)제도가 부활하면서 그는 가오카오를 통해 ‘지식청년은 농촌에 뿌리내린다’는 운명에서 탈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시에 남기를 원했던 바람에 따라 베이징(北京) 소재 전문대학에서 위성통신을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의 결정은 그의 인생 후반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가 중국 통신 및 인터넷 사업 발전에 빠질 수 없는 기여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시의 결심 때문이었다. 
 
40여 년을 한결같이 노력하며 황청칭은 몇 번이나 자신만의 지식세계를 깨뜨리고 다시 구축했다. 그리고 중국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중국 통신사업의 선진화와 인터넷의 발전을 추진했다. 그간의 업적을 들으며 놀라는 우리에게 황청칭은 담담하게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통신도 좋고 인터넷도 좋다. 국가가 발전하는 과정에는 길을 까는 사람, 다리를 놓는 사람도 있고 차를 모는 사람, 화물을 나르는 사람도 있다. 그 중 우리는 길을 깔고 다리를 놓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2004년 12월 30일, 베이징무선통신서비스위원회(北京無綫信息服務委員會)가 성립됐다. (윈쪽부터) 당시 황청칭 중국인터넷협회 부회장, 저우시성(周錫生) 신화왕(新華網) 총재, 장차오양(張朝陽) 써우후왕(搜狐網) 총재, 가오루린(高盧麟) 중국인터넷협회 부이사장, 왕옌(汪延) 신랑왕(新浪網) 총재, 딩레이(丁磊) 왕이(網易) 총재는 결성식에 참석하고 단체사진을 찍었다. 사진/IC

“내가 놓은 전로(電路), 전국에 없는 곳 없어”
1980년 5월 베이징 장거리통신학교를 졸업한 황청칭은 베이징 무선통신국(局)으로 파견되었다가 이후 1989년 우전부(郵電部) 전신총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 배치된 일터에서 황청칭은 물밀듯이 밀려든 통신수요로 눈 코 뜰 새가 없었지만, 그 안에서 개혁개방의 거대한 발전잠재력을 엿볼 수 있었다. “개혁개방이 막 시작되고 중국 경제가 막 첫 걸음을 뗀 때였다. 통신 관련 수요가 특히 컸는데, 그때 돈으로 5000위안을 들여도 전화를 설치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1990년 중국의 일인당 GDP는 1644위안이었다) 당시 우전부 전신총국 부장 비서였던 나는 전화를 설치해줄 사람을 찾아 2000위안을 썼지만 결국 전화를 놓지 못했다. 얼마 뒤 ‘다꺼다(大哥大, 휴대전화)’가 등장했을 때는 3만위안을 주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개인 수요뿐만 아니라 중국 각 성(省)들에서도 통신발전에 대한 수요가 대단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은 ‘부유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길을 깔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길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익숙한 고속도로나 철도를 가리키기도 했지만, 데이터 통신용 전로 또한 빠질 수 없었다. “당시 상하이(上海)까지 마이크로웨이브 통신망을 깔기 위해서는 쉬저우(徐州)에서부터 전로 부설 작업을 해야 했다. 전로를 까는 것은 그 지역에 돈을 주는 것과 같아 경제 발전을 자극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성(省)에서 전로를 깔고자 우리를 찾았다.” 
 
수요가 경제발전을 촉진하던 가운데, 황청칭은 한 가지를 감지했다. 전신부의 관리체제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1998년 정보산업부가 설립되면서 황청칭은 정보산업부 전신관리국 서비스품질감독처 처장을 맡게 됐다. 전신서비스 품질을 관리감독 하는 것이 주요 임무로, 황청칭은 연구조사를 통해 통신부처에 고객 서비스 개념이 없음을 확인했다. 당시 통신부처는 갖가지 명목으로 비용을 징수하고 있었고, 전화 설치를 신청해도 약속시간을 지키지 않았으며 유지보수 서비스 수준 또한 매우 낮았다. “그때까지 통신부처는 당과 정부·군부의 고급 간부를 위한 서비스부처였다.
 
경제의 합리성이라는 개념도 몰랐고, 국가를 위해서만 제공되는 일종의 고급서비스였다. 특히 이제 막 상품화한 전화 시장은 판매자 시장에 속했고, 사람들은 통신부처에 전화 설치를 주문해야 했다.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는 꼭 관념이 달라져야 하며, 대중을 위한 서비스 의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황청칭은 곧 조직을 이끌고 통신부처 서비스품질 개선방안을 모색했다. 그의 지휘 하에 정보산업부는 관리감독방법·고객 불만사항 처리방법을 마련했고, 통신기업 보고제도·서비스품질 공고제도·고객불만제도를 제정함과 동시에 고객서비스센터를 설치했다. 이들 기준과 방법, 제도들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황청칭은 그러나 통신부처 서비스 문제가 아직도 존재하며 다만 문제의 종류가 달라졌다고 지적한다. “지금의 문제는 주로 기업들이 자신의 경제효과만 고려해 그럴싸한 결합상품을 내놓고 소비자들의 소비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통신부처는 새로운 조치를 마련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2016년 2월 1일, ‘2015청춘중국--인기 최고의 APP 추천’ 수상식 행사가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사진은 황청칭 중국인터넷협회 부이사장이 수상식 행사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XINHUA 

“인터넷, 완벽하지는 않지만 성공은 성공”
황청칭과 그의 동료들이 통신분야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또 한번의 거대한 변혁이 소리 없이 다가와 있었다. 1994년 초 중미 양자간 과학기술공동회의 개막을 앞두고 있던 때, 후치헝(胡啟恒) 당시 중국과학원 부원장은 중국을 대표해 미국 국가과학재단(NSF)에 국제 인터넷 가입을 신청해 최종 승인을 얻었고, 그 해 4월부터 국제 인터넷에 정식으로 접속이 가능하게 되었다. 황청칭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흥분감을 감추지 못함과 동시에 아쉬움도 드러냈다. 
 
“통신업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돌발상황 대응과 백업이라는 관점에서 인터넷의 존재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인터넷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인터넷을 그저 과학연구 목적의 것으로만 여겼다. 우리는 네트워크 관리시스템 부재가 매우 큰 문제라고 여기고 있었다. 또한 비용계산시스템도 마련되기 전이었고 서비스 품질도 보장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네트워크가 국가의 인프라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인터넷 발전을 추진하지 않았고, 그래서 중국과학원이 먼저 중국의 국제 인터넷 편입을 진행한 것이었다.” 
 
중국이 국제 인터넷 네트워크에 편입한 이후 황청칭이 염려했던 문제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특히 관리 및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가장 컸다. 인터넷은 사람들간 교류와 정보전달을 편리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유해정보를 가져왔고 결국 네트워크 보안이 의사일정에 포함되었다. 2000년 국가 인터넷 응급센터가 조직되면서 황청칭은 관련 업무 책임자로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터넷 관리가 결코 그 나라만의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글로벌 인터넷 공동 관리에 참여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 중국 정부는 국제적 인터넷 무정부주의로 인한 장애에 부딪혔다. 
 
“당시 아이칸(ICANN)이라는 인터넷 주소 관리기구가 있었다. 아이칸은 각국의 민간기구를 소집해 인터넷 주소 분배에 관한 토론을 진행했는데, 인터넷의 ‘무(無)국경·무정부·무관리’ 영향을 받았던 아이칸은 정부를 배척했다. 때문에 중국 공업정보부는 아주 일찍부터 아이칸 총회에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책결정권은 갖지 못했다. 각국 민간기구 대표들이 표결을 진행할 때, 중국 공업정보부 대표는 자리를 떠날 것을 요구받았다.” 
 
인터넷이라는 중요한 인프라 건설에 정부는 참여하지 않는다는 정책결정은 당시의 중국 측 대표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중국 측 대표가 귀국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은 중국인터넷협회 결성을 결정했고, 중국 정부를 대표해 글로벌 인터넷 관리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된 이가 바로 황청칭이었다. 중국인터넷협회 주요 설립 책임자가 된 그는 이때부터 중국 네트워크 보안 개선과 글로벌 인터넷 관리라는 길고 긴 여정에 올랐다. 
 
“지금은 같은 위치에 서 있다. 어떤 부분에선 선두를 달린다”
2002년 3월 초, 남방주말(南方周末) 첫 면에 실린 글 하나가 황청칭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중국 이메일, 구미국가에서 전면 봉쇄 당하나라는 제목의 글로, 중국 인터넷 상의 문제점으로 스팸 메일의 범람을 지적한 글이었다. 이 글이 실린 후 후치헝 당시 중국인터넷협회 이사장이자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은 양회(兩會, 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스펨메일 처리를 제안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후 이사장의 제안은 황청칭에게 전달되었고, 황청칭은 전자메일입법에 관한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3년여의 노력 끝에 전자메일 관리방법이 확정되었다. 2005년 11월 정보산업부는 인터넷 전자메일서비스 관리방법(관리방법)을 발표했다. 황청칭은 관리방법이 중국 인터넷 발전 여정에서 가장 성공적인 규정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상기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얼마 뒤 우리는 한가지 분석을 했다. 그 결과 중국의 스팸 메일 건수가 12위까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중국 네티즌 수가 세계 최다였음을 고려할 때, 관리 노력이 상당히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스팸 메일 퇴치 노력뿐만 아니라 바이러스 퇴치·유해 선전물 및 유해 정보 관리·360과 텐센트(騰訊)간 분쟁 해결·인터넷업계 자율규범 마련 등 은 모두 황청칭이 이끄는 중국인터넷협회가 힘써 얻은 결과다. 이와 함께 중국 국내 네트워크 보안을 개선하고, 글로벌 인터넷 거버넌스에 중국을 참여시키고 전세계가 중국의 노력을 충분히 알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그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다. “글로벌 인터넷 거버넌스에 있어서 중국은 뒤따라가던 입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입장이 되었고, 일부 영역에서는 이미 선두주자가 되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몸으로 느낀 바다.” 
 
중국인터넷협회는 2004년부터 중국 국내 관련 기구 및 조직과 공동으로 ‘정보 무(無)장애 행동’을 발족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혜택을 누리는 정보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정보사회에서는 맹인도 장애인도 모두 공평하게 정보를 얻어야 한다. 예를 들어, 비(非)장애인은 인터넷에 접속해 인증번호를 확인할 수 있지만 장애인은 그럴 수 없어 인터넷 접속에 불편함이 크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들이다.” 
 
여러 부처위원회와 각 사업단위들의 협력으로 ‘정보 무장애 행동’은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 2008년 3월 공업정보화부는 정식으로 중국 최초의 정보 무장애 표준인 정보 무장애-신체기능 약소 대중-사이트설계 무장애기술 요구를 발표, 사이트 콘텐츠에 감지가능·조작가능·이해가능·호환가능 기능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후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장애인올림픽, 그리고 2010년의 상하이엑스포에서 모두 정보 무장애를 실현했다. 이후 2013년 중국인터넷협회는 ‘아름다운 중국-중국 행정(政務)정보 무장애 공익활동’을 개시했다. 2014년부터는 ‘아름다운 중국-중국 100개 도시 정부 행정정보 무장애 행동’과 ‘아름다운 중국-중국 100개 주류 온라인매체정보 무장애 행동’을 시작했다.
 
2008년 유엔(UN) 인터넷 거버넌스 포럼(IGF)과 2016-2017년의 국제전기통신연합(ITU) 정보사회세계정상회의(WSIS)에서 중국인터넷협회는 각국 대표들과 중국의 정보 무장애 건설 성과를 공유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중 ‘중국 행정정보 무장애 서비스체계’는 2017년 WSIS 챔피온상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언젠가 무장애 행동에 대해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호주 출신 대표가 내용이 아주 좋다며 영문으로 만들어 자신들이 사용해도 되겠냐고 물었다. ‘개혁개방을 막 시작했을 때 당신들의 선진기술을 배우기 위해 우리는 영어를 배웠다. 이제 당신이 중국어를 배워보는 것은 어떤가’ 이게 나의  대답이었다.”  
 
“미래, 우리의 네트워크 관리개념은 달라질 것”
중국 네트워크 관리에 참여한 원로급 인물로서 황청칭은 중국의 인터넷 기업의 성장에 남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인터넷기업의 발전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분수령이 되는 것이 바로 2009년이다. 

“2006년 미국 버클리대학교에 방문학자로 있던 동료를 방문한 적 있다. 동료를 따라 그의 미국 지도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 미국인이 내게 이렇게 물었다. ‘미국에서는 인터넷이 경제성장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는데, 중국의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의 상황은 미국과 다르다는 게 그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중국인들은 인터넷을 오락적으로만, 예를 들어서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데 주로 사용하는 등 인터넷이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다시 말해, 2009년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인터넷은 소비형 인터넷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강대해진 지금의 중국 인터넷 기업들을 보면 모두 그 당시에 첫 걸음을 뗀 기업들이다.” 
 
2009년이 되면서 풍향계가 달라졌다. 2009년은 중국인터넷협회가 주최한 중국인터넷대회가 ‘융합촉진발전, 창조가치 침투’라는 주제로 개최된 해였다. 당시 황청칭은 인터넷이 사회경제의 확대기이자 증폭기가 될 것임을 직감했고, 실제 일련의 신호들이 그의 판단을 뒷받침 해주었다. 일례로 2008년 중국 전자상거래 B2B시장 거래액은 3조 위안에 달했고, 인터넷쇼핑 거래액도 사상 처음으로 1000억 위안을 돌파했다. 전자상거래가 활성화한 가운데 다양한 신규 업태(業態)들이 잇따라 탄생하며 ‘인터넷 플러스’ 맹아기가 시작되었다. 2015년에 이르러서는 정부업무(工作)보고에 처음으로 ‘인터넷 플러스’ 행동계획이 언급되었고, 이후 다양한 신규 업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황청칭은 중국 인터넷 기업의 발전이 중국의 인터넷 관리처럼 ‘따라가던 것에서 나란히 달리게 되고, 마침내 선두의 위치에 서는’ 과정을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첫 걸음을 뗐을 때, 중국 인터넷 기업들은 분명 모방을 많이 했었다. 텐센트의 QQ는 MSN을 모방한 것이었고, 바이두(百度)는 구글을 따라 했다.
 
그러나 최근 3-5년 사이 우리는 중국 인터넷 기업들의 신 모델 탐색 과정을 지켜 보았다. 모바일 결제·모바이크(摩拜單車)·인터넷금융은 중국 인터넷 기업이 성장의 새 단계에 올라섰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들은 이제 막 자신들이 만든 것들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 중국의 모바일 결제 어플리케이션은 매우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고, 모바이크는 미국 워싱턴에까지 등장했다. 인터넷금융은 어떤가 미국에도 없는 개념이 중국에서는 쾌속 발전을 실현할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장단점이 있듯 중국 인터넷의 혁신과 발전은 황청칭에게 또 다른 부담을 가져왔다. 황청칭 그의 인생과 사업 궤도 전반을 관통하고 있는 그것, 바로 사고방식의 전환과 체제변혁 문제이다. 
 
“인터넷이 미래에 가져올 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지금의 ‘인터넷 플러스’를 보면 벌써 전통의 관리감독체계에 새로운 도전을 초래했다. 5G·사물인터넷·IPv6 등이 향후의 흐름이 되겠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것뿐,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현재 주목해야 할 것은 보안 위기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점이다. 인터넷 관리에 대한 관념이 전환되야한다. 모든 관리감독에는 기술적 수단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정책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글|왕숴(王爍), 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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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연(緣)문화제’, 빙설의 정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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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예술교류’ -중한 유명교수 2인의 공동 도자기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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