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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허이, 개혁개방을 통해 성장한 ‘미스터 자동차’

2018-11-05 글|장진원(張勁文)

쉬허이 베이징자동차그룹 회장  사진/ VCG

한 나라의 산업화에 있어서 자동차 산업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산업국가의 중추임과 동시에 한 나라의 산업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자동차 산업이다. 

개혁개방을 추진해온 40년 간 중국 자동차산업 또한 역경을 딛고 세계로 뻗어나가는 과정을 겪었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배경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개혁개방 세대의 묵묵한 헌신과 공로다. 베이징(北京)자동차그룹유한회사(옛 베이징자동차그룹총회사. 2000년 9월 베이징자동차공업지주유한책임회사로 사명 변경. 이후 2010년 11월 베이징자동차그룹유한회사로 재변경. 이하 베이징자동차)의 당위원회 서기이기도 한 쉬허이(徐和誼) 회장은 시대가 낳은 걸출한 ‘미스터(Mr) 자동차’ 중 한 사람이다. 

쉬허이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자동차를 선택한 그는 사실 공무원 출신으로, 사업가로 변신한 데 따른 중압감 속에서 위기에 처해 있던 베이징자동차를 살려냈다. 16년의 자동차 인생 중 쉬허이는 베이징자동차를 산업을 대표하는 ‘명함’으로 일궈냈으며, 중국 자동차 산업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베이징자동차를 계기로 시작된 ‘새로운 인생’  
1978년 중국의 대학입학시험 가오카오(高考)가 부활한 이듬해 쉬허이는 베이징강철학원(현 베이징과기대학) 강철체련과에 입학했다. “공예학이 전공과목이었다. 이 과목의 특징은 나로 하여금 세부적인 것에 주목하게 함과 동시에 전체적인 설계와 계획에 주의를 기울이게 했다는 것이다.” 당시를 회상하는 쉬허이의 얼굴에서 감격스러움이 묻어났다. 대학에서의 학업은 세부적인 것과 전체 모두를 고려하는 사고방식을 길러주었고, 그의 전 생애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다. 

1982년 대학을 갓 졸업한 그는 중국서우강(首鋼)그룹에 입사, 이후 15년의 시간을 보냈다. “서우강은 아주 큰 용광로다. 나는 운 좋게도 좋은 스승을 만났고, 그 시간 동안 기업경영에 관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때의 경험은 내 평생의 소중한 자산이다.” 인재들이 넘쳐나는 서우강이지만 쉬허이는 자신만의 노력으로 고속가도를 달렸다. 일개 설계직원에서 한 단계씩 성장하며 마침내 서우강 부사장 자리에까지 오른 그다. 

1997년 쉬허이는 서우강을 떠나 정계에 진출했지만 5년 뒤 다시 기업으로 돌아갔다. 이때 선택한 것이 바로 베이징자동차였다.베이징자동차는 중국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찍이 1958년 베이징자동차의 전신인 베이징자동차부품공장은 ‘징강산(井岡山)’이라는 이름의 승용차를 출시했다. 베이징자동차가 생산한 지프차 ‘뤼허쯔(綠盒子)’는 남녀노소 모두에게 이름을 알렸고, 모델명 ‘212’의 지프차는 전국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개혁개방 전까지 중국 자동차 업계는 뒤쳐져 있었다. 특히 승용차 생산량이 매우 적었다. 주요 고객은 정부나 기업으로 가정용 승용차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자동차 생산량을 늘리고 기술력을 제고하기 위해 중국 자동차 업계는 1984년부터 해외 자동차기업과의 협력과 외국의 선진기술 도입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베이징자동차는 이 같은 흐름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1984년 1월 베이징자동차와 다임러크라이슬러(DCC)·다임러 크라이슬러(중국)투자유한회사(DCCL)가 참여한 중·미·독 합자경영기업 ‘베이징지프’가 탄생했다. 중국 자동차업계 최초의 중외 합자기업으로 물꼬를 열자 중국 자동차 업계에는 순식간에 1차 합자 물결이 일었다. 1985년 3월 중·독 합자 승용차 생산기업인 상하이폭스바겐(上海大衆)이 설립된 데 이어, 같은 해 난징(南京)자동차는 이탈리아 피아트 산하였던 이베코를 도입했고, 광저우(廣州)자동차는 프랑스의 푸조와 합자프로젝트 추진을 선언했다. 수십 년 간 침묵했던 승용차 산업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이 도입한 체로키 모델이 미국에서 생산 중단됨에 따라 베이징지프의 행보에 제동이 걸렸다. 더구나 내부 문제 또한 베이징자동차가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당시 베이징내연기관공장, 베이징자동차 오토바이 연합제조유한회사 등 베이징자동차 산하 회사들은 줄곧 각자의 경영모델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베이징자동차 본부는 그룹 전체에 대한 실질적인 관리권한을 가질 수 없었다. 시장 위축에 더해 그룹 관리의 혼선까지 빚어지며 업계에는 한때 베이징자동차가 사라지고 이를 대신해 베이징시 ‘자동차처(汽車處)’가 설립될 것이라는 설까지 퍼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이징자동차는 2002년 중대 인사를 단행했다. 44세의 쉬허이를 베이징자동차공업지주유한책임회사의 당위원회 부서기 겸 부회장으로 임명한 것이었다. 베이징자동차를 이끌게 된 쉬허이, 그는 기사회생을 위한 일전을 시작했다. 

쉬허이 부임 후 베이징자동차가 치른 첫 번째 ‘대사(大事)’는 합자기업인 베이징지프의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베이징자동차는 한국 현대자동차로부터 ‘러브콜’을 받은 상태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베이징자동차와 현대자동차의 협력을 낙관하는 사람은 없었고, 협력을 한다해도 ‘약체(弱體)끼리의 연합’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쉬허인에게는 이것이 향후 성공적인 협력 사례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경쟁이 치열한 환경에서 두 개의 약체는 보다 쉽게 하나가 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국기업을 배워 미국 자동차 업계가 발전했고, 미국기업을 배운 일본 자동차가 가장 상대하기 힘든 적수가 되지 않았나? 한국 자동차가 지금과 같은 고속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일본의 성공적인 경험을 참고했던 것이 주효했다. 중국 자동차가 다음 차례의 경쟁에서 기회를 얻고자 한다면 일본과 한국의 자동차 업체들이 최고의 본보기다.” 

2002년 5월 28일 베이징자동차는 한국 현대자동차와 ‘베이징현대자동차유한회사’ 합자 설립에 관한 협의를 체결하고 한국 현대자동차의 ‘소나타’를 도입하기로 했다. 한달 뒤 쉬허이에게는 또 다른 중대 임무가 주어진다. 베이징현대자동차유한회사의 회장 겸 총경리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당초 쉬허이의 결정이 정확했음은 사실로써 증명됐다. 불과 3년 만에 ‘베이징현대’의 생산량은 종전의 5만대에서 15만대, 다시 30만대까지 늘어났다. 베이징현대가 놀라운 실적을 기록하자 베이징자동차 내부적으로 쉬허이의 명성이 높아졌다. 2006년 10월 쉬허이는 베이징자동차 회장이 되었다. 

쉬허이의 진두지휘로 베이징현대는 이른바 ‘베이징현대 속도’를 기록했지만 자동차 부품과 관련해서는 중한 양측의 표정이 엇갈렸다. 베이징현대 설립 당시 한국 현대자동차는 현대모비스 등 한국 자동차 부품기업을 대동했다. 한국 측은 베이징자동차와 소수의 합자 부품기업을 설립했지만, 당시 베이징자동차 지분은 30% 미만에 그쳤다. 베이징현대가 구매하는 부품은 절대 다수가 한국 기업 제품이었으며, 특히 일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생산된 부품의 경우 중국 국내기업 비중은 20-30%에 불과했다. 

거액의 이윤이 한국측으로 흘러갔고 중국측 기업은 좀처럼 빛을 보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쉬허이는 조바심이 났지만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베이징자동차는 자체 부품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고, 그렇기 때문에 발언권을 얻을 수도 없었다. 이때 쉬허이는 한 가지 결심을 했다. 자체 부품체계를 구축하고 실력으로써 발언권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시대의 요구에 따라 탄생한 것이 베이징자동차 부품 플랫폼인 ‘하이나촨(海納川)’이다. 

2007년 11월 30일 베이징의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서 베이징 하이나촨의 설립 기념식이 열렸다. 쉬허이가 계획한 부품 플랫폼이 정식 운영에 돌입한 것이었다. 하이나촨 설립 후 베이징자동차는 자체 부품체계를 구축했고 빈틈없는 배치 과정을 거쳐 2008년 1월 베이징현대는 부품구매방식을 기존의 ‘전략적 구매’에서 경쟁 구매 위주로 전환하며 부품의 현지화율을 높였다.

“자동차 업계의 리더라는 자리는 강하지 못하면 절대 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 기업들은 그(쉬허이)와 같이 정확한 사고와 박력을 가진 리더를 필요로 한다. 자동차 업계는 박력있는 사람이 부족하다!” 쉬허이의 오랜 후배가 쉬허이에 대해 내린 평가다. 

2014년 11월 6일, 베이징 소재 베이징자동차 연구개발(R&D)기지 및 베이징자동차 베이징지사 공장의 생산라인 내부 모습   사진/XINHUA

사업의 전국적 확대 및 자주 브랜드 구축 
베이징자동차의 수장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쉬허이는 베이징자동차의 그룹화 전략에 대해 고민했다. 당시 그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둘 중 하나, 크기를 먼저 키운 뒤 힘을 키우거나 아니면 힘을 먼저 키운 뒤 크기를 키우는 것이었다. 당시의 정부 정책환경과 자동차 산업 기반을 고려한 끝에 전자를 선택한 쉬허이. 2008년부터 그의 그룹화 전략 중 ‘전국으로의 배치’라는 새 장이 열리기 시작했다.  

2008년 8월 베이징자동차홀딩스와 베이징자동차제조남방생산기지의 연간 생산량 20만대 기원행사가 후난(湖南)성 주저우(株州)에서 열렸다. 베이징자동차의 전국적인 행보의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 자리였다. 

이후 5년, 베이징자동차는 한 걸음씩 전진하며 ‘동서남북중(東西南北中)’ 5대 산업기지 배치를 완료했다. 2011년 허베이(河北)성의 베이징자동차 황화(黃驊)자동차생산기지 건설을 개시하며 화북(華北)지역에의 배치를 완료했다. 같은 달 베이징자동차 광저우(廣州) 쩡청(增城)기지 건설을 위한 첫 삽을 뜸으로써 화남(華南)지역의 자동차 생산 및 수출기지와 대외 합자협력플랫폼을 마련했다. 2013년 8월에는 장쑤(江蘇)성의 전장(鎮江)자동차제조공장을 인수해 구조조정을 단행했으며, 9월에는 전장 단투(丹徒)구에 화동(華東)산업기지 건설에 착수함으로써 창장(長江)지역과 나아가 화둥지역의 공백을 메웠다. 또, 같은 해 10월에는 서남(西南)자동차기지 건설에 착수함으로써 해외시장 개척에 힘을 보탰다. 

베이징자동차의 전국적 배치를 추진함과 동시에 쉬허이는 그룹화 전략의 2단계를 고민했다. 바로 영향력을 가진 자주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휘하 베이징현대와 베이징벤츠가 빠른 성장세를 구가하고는 있었지만 베이징자동차가 더 큰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주 브랜드가 있어야 함을 쉬허이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독자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해 쉬허이는 먼저 서방의 유명 자동차업체를 인수하여 그 핵심기술을 확보한 뒤 다른 도전을 하기로 했다. “베이징자동차처럼 기술과 인재풀 등의 부분에서 축적 기반이 약한 기업은 독자 브랜드를 구축하는 데 있어 보다 빠르고 건강한 길, 조금이라도 덜 돌아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서야 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 서야만 멀리 바라볼 수 있다.” 쉬허이의 말이다. 

실제 베이징자동차의 발전 시간표에는 동종업계 경쟁자들을 앞지르겠다는 ‘후발주자’의 갈망과 야심이 드러나 있다. 먼저 2006년 베이징자동차연구본부유한회사가 설립됨과 함께 베이징자동차 산하 4개 완성차기업,‘베이징창청화관(北京長城華冠) 등 3대 민영디자인업체, 칭화(淸華)대학교·베이징공업대학교 등 5개 대학, 중국과학원 전기공학소 등 4개 연구기관이 참여한 ‘베이징자동차 자주연구개발팀’이 구성되었다. 베이징자동차 하이나촨은 2007년부터 존슨콘트롤즈·리어·델파이·비스테온·테네코 등 유명 기업들과 잇따라 손을 잡고 부품산업체인체계를 구축해 베이징자동차의 독자브랜드 육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2009년 베이징자동차는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그해 말 GM·사브와 협약을 체결해 GM 산하 스위스 사브의 9-5·9-3시리즈 3개 완성차 플랫폼과 두 개 시리즈의 터빈증압엔진, 그리고 관련 기술 및 지식재산권을 인수하기로 한 것이다. 

사브 기술을 인수하고 2년 뒤인 2011년, 베이징자동차는 사브의 기술을 기반으로 완전히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고급 세단 플랫폼 ‘M-trix’를 공개했다. 이는 베이징자동차가 독자 브랜드의 고급모델 제조기술 한계를 극복할 핵심기술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외부로부터 가져온 기술을 완전히 소화흡수하고 독자 개발의 경험을 축적한 베이징자동차는 자체 승용차 기업을 설립해 고급 모델인 ‘선바오(紳寶)’ 시리즈를 출시했다. 상용차 시장에서는 베이징자동차 산하 푸톈(福田)자동차가 최고 브랜드로 자리잡은 지 오래였다. 푸톈자동차는 10년 연속 판매량 기준 전국 1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독자 브랜드의 등장은 베이징자동차의 업그레이드에 자극제가 되었다. 2013-2017년 수 년 연속 세계 500대 기업에 든 것은 물론, 5년 만에 순위가 199단계 상승하면서 137위에 올랐다. 

베이징자동차와 함께 중국 전체 자동차 산업 또한 성장했다. “중국은 글로벌 최대 자동차 시장이자 전세계 자동차 업계 경쟁구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시장이다. 21세기 이후 중국 시장은 연평균 약 20%의 성장률로 전세계 자동차시장 성장의 엔진이 되어왔다. 2009년 처음으로 글로벌 판매량 1위를 기록한 뒤 8년 연속 생산량·판매량 1위의 자리를 안정적으로 지켰다. 지난 10년 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로컬기업들이 나왔고, 수 많은 국제 자동차 업계 거물도 등장했다. 중국 자동차 업계는 불과 10여 년 만에 양적 축적을 완성했고, 지금은 질적 비약을 앞두고 있다.” 중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과정을 이야기 하는 쉬허이의 얼굴은 한껏 상기돼 있었다. 

‘신에너지차’가 새로운 성장포인트 
2014년 이후 자동차 업계의 ‘총아’로 부상한 신에너지차. 중국 대형 업체들은 잇따라 야심찬 신에너지업무계획을 발표했고, 다임러·폭스바겐 등 글로벌 다국적 기업들도 합자방식으로 중국 내 업무를 강화했다. 자동차 업계에 뛰어든 인터넷 기업들 또한 약속이나 한 듯 신에너지차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2015-2017년 중국 신에너지 완성차 투자 건수는 30개 이상이었고, 총 투자규모는 1000억 위안(약 16조3700억원) 이상, 총 생산능력은 300만대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3년 간의 경험을 통해 중국 신에너지차업계 펀더멘털에 중대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국 정부 또한 신에너차 산업의 발전을 위한 로드맵을 마련했다. 일례로 2016년 10월 발표된 <에너지 절약 및 신에너지차기술 로드맵>에는 생산량 및 판매량 목표가 제시됐다. ‘13차 5개년 계획’, ‘14차 5개년 계획’, ‘15차 5개년 계획’ 기간동안 중국 신에너지차의 연평균 성장률을 각각 90.5%, 30%, 33%씩까지 끌어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쉬허이는 “중국 자동차 산업은 전기동력화(전동화)로의 전환이라는 신시대에 진입했다”며 “21세기 초의 ‘황금 10년’을 잇는 또 다른 기회의 시대가 곧 열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2015년 ‘전동화 전환’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베이징자동차는 남보다 한 걸음 빨리 움직였다. 전동화·스마트화·커넥티드 선진기술을 통합하고 응용하기 위해, 새로운 제품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업계에서 가장 먼저 신기술연구원을 설립한 것이다. 현재 베이징자동차는 바이두(百度)·샤오미(小米) 등 인터넷기업들과 협업 중이며, 산업 경계를 초월한 혁신과 융합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혁신을 집대성화하고 있다. ‘인터넷 플러스’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가운데 신에너지차의 단맛을 봤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베이징자동차 산하 베이징신에너지자동차주식유한회사는 2017년 10만3200대의 판매량을 기록해 5년 연속 중국 1위, 2017년 세계 신에너지차 1위를 차지, 중국 자동차 브랜드로서 독보적 기록을 창조했다.  

쉬허이에 따르면 중국 신에너지차가 가는 길은 ‘나’ 중심의, 자력갱생 중심의, 완전히 새로운 발전의 길이다. 신에너지차의 미래를 밝게 점치는 쉬허이는 “전동화로의 전환에서 중국은 이미 글로벌 선두에 서 있다”며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전력을 다해 중국 신에너지차를 고속철·특고압·원전기술 같은 국가의 명함으로 키우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중한 연(緣)문화제’, 빙설의 정으로 인연을 이어가다

땅거미가 내려앉자 아름다운 빛깔의 빙등(冰燈, 얼음 등)이 어둠에 가려있던 룽칭샤(龍慶峽)를 밝게 비췄다. 빙등은 마치 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 같았다. 2월 3일 밤, 한국 충남국악관현악단과 뜬쇠예술단이 한국 전통공연인 ‘사물놀이’의 빠른 리듬에 맞춰 무대에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빙설정-중한 연 문화제’가 막을 올렸다. 이제 중한 연 문화제는 얼음과 눈을 다리 삼아 중한 양국의 우정을 이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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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넘은 예술교류’ -중한 유명교수 2인의 공동 도자기전시회

중국과 한국 양국의 유명교수 두 사람의 공동 도자기 전시회가 1월 13일 베이징 허비싱도자기예술관에서 열렸다. 중국 징더(景德)진(鎭)에서 온 닝강(寧鋼) 교수(징더진도자기대학교 교장)와 한국 단국대학교 도예과 박종훈 교수의 도자기 작품 총 90점이 선보인 이번 전시회는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에게 두 학구파 예술가들의 독특한 예술 특징을 보여주고, 서로 다른 역사·문화 배경 하에 자리잡은 도자기 예술의 표현방식 및 심미세계를 확인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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