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9
2021년 6월 21일 하지(夏至), 산시성 샹펀현 타오쓰 유적지. 사진/VCG
산시(山西)성 남부 샹펀(襄汾)현 타오쓰(陶寺)향에 위치한 타오쓰(陶寺) 유적은 펀허(汾河) 강가와 린펀(臨汾)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1978년 최초 발굴 이후, 현재까지 타오쓰 유적에서 성벽, 궁궐터, 대형 종교·예식 건축물, 왕릉 터, 수공예 작업 터, 정부 관리 대형 창고 터와 일반 주민 거주 터 등이 속속 발굴됐다. 고고학적 증거는 4000여 년 전 이곳이 정치, 경제, 군사, 종교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타오쓰 유적은 최초의 ‘중국’이라고 불린다. 왕웨이(王巍) 중국 사회과학원 학부 위원이자 역사학부 주임은 “타오쓰 문명의 궁중 제도, 예법 제도 등은 하(夏), 상(商), 주(周) 3대 왕조에 의해 계승되고 흡수됐으며 후대 왕조 문명에 큰 영향을 끼쳤다”라고 말했다.
경천위지의 ‘최초의 중국’
“지금으로부터 4500여 년, 가장 발전된 역사의 무대는 진난(晉南, 산시성 남부)으로 이동했다. 진난에서 시작된 타오쓰 문화는 고대 역사에서 요순(堯舜) 시대에 해당한다. 즉 선진(先秦) 역사서에 등장한 최초의 ‘중국’이 화하(華夏)의 근간을 다진 것이다.” 고고학자 쑤빙치(蘇秉琦)는 타오쓰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타오쓰 방국(邦國)의 시공간적 정치 문명의 핵심 유전자는 바로 ‘하늘과 땅을 다스린다’라는 뜻의 ‘경천위지(經天緯地)’다.” 오랫동안 타오쓰 고고학팀을 이끈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허누(何努) 연구원은 이같이 말했다.
허 연구원은 “‘경천’의 핵심 내용은 정치, 즉 왕권이 태양 지평선력, 규표로 측량한 태양력, 음양 합력을 통해 날짜와 시간을 통제하는 것이고, 타오쓰 방국의 시간 관리는 국가의 통치와 정치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화하 문명의 특징은 천체를 관측하고 역법을 제정해 백성에게 농사철을 알려주는 것이다. 타오쓰 유적은 이런 중요한 특징을 확인해 줬다.” ‘위지(緯地)’란 타오쓰 왕권이 천문 대지 측량을 활용해 정치 지리적 오방(五方)의 천하관을 수립하고 음양 팔괘 팔방(八方)이라는 공간 개념으로 도성의 기능 계획을 관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를 통해 중·극(왕권을 상징하는 건물이나 시설)을 건립하고(建中立極) 강산사직(江山社稷)의 공간 명맥을 장악했다.
이런 철학적 설명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구체적인 고고학적 증거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훨씬 이해가 쉬울 것이다.
타오쓰 중기 대성 남동부에 위치한 타오쓰 관상대 유적지에서 고고학자와 천문학자들은 관상대 모형 건축물을 복원했다. “관상대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그 당시 천문을 통해 농업 생산을 지도·관리했다는 것을 뜻한다. 핵심적이고 선진적인 기술로써 ‘하늘(天)’에 대한 탐색과 추구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오장타오(高江濤) 중국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연구원이자 타오쓰 고고학팀 팀장은 타오쓰 관상대에서 20개 절기를 관측할 수 있었는데 이는 <상서요전(尚書堯典)>의 ‘관상수시(觀象授時, 상을 관측해 시간을 알림)’ 기록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타오쓰 초기 왕족의 무덤에서 규척(圭尺)과 입표(立表)가 출토됐다. 이는 현재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규표(圭表)의 실물 자료다. 허 연구원은 “규표가 태양 그림자를 측량하는 도구로 사용되며, 정오에 태양이 표를 비추면 규에 새겨진 눈금으로 그림자의 길이를 측량한다”라고 설명했다. 하지에 그림자가 가장 짧고, 동지에 가장 길다. 규표는 태양 역법 제정에 사용할 수 있고, ‘지중(地中)’을 측량하고 찾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 타오쓰 규척의 열한 번째 눈금의 길이는 40cm로 타오쓰의 1.6척(尺)과 비슷하다. 이는 4000년 전 진난 지역의 ‘지중’ 표준 척도였고 이를 통해 측량된 ‘지중지도, 중토지국(地中之都, 中土之國)’이 바로 ‘중국’이다.
허 연구원은 이어 “타오쓰 도성 유적지과 타오쓰 문화의 방국 사회 구조는 ‘지중’ 개념과 완벽하게 결합돼 있고 ‘최초의 중국’ 개념은 타오쓰에서 출현했거나 형성됐다”라고 덧붙였다.
“‘중(中)’이라는 개념은 매우 중요하다.” 펑스(馮時) 중국 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이자 고고학 연구소 연구원은 “‘중’은 고대 중국의 정치관이자 종교관에서 ‘천지의 중앙’을 의미한다. 상제와 천신은 하늘의 중앙에 살고 하늘의 뜻인 ‘천명(天命)’을 받은 왕권은 반드시 땅의 한가운데에 궁궐을 건설해야 비로소 인간의 왕과 천제(天帝)가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펑 연구원은 “고고학과 문헌학, 천문학 연구를 종합하면 적어도 6500년 전에는 ‘지중’이 타오쓰 일대였다. 타오쓰와 거의 동일한 위도에 위치한 푸양(濮陽) 시수이포대묘(西水坡大墓)가 그 증거이고 두 지역의 하지 그림자 길이가 거의 비슷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화구주(禹畫九州, 대우가 중국을 9개 주로 나눔)’ 이후 천하 구도에 변화가 발생했다. 하(夏)나라 중·후기에 이르러 상(商)나라의 선조인 상갑미(上甲微)는 당시 측량한 지중은 진짜 지중이 아니며, 다시 측량한 결과 지중은 쑹(嵩)산 일대라고 정해 이후 하나라 왕실은 얼리터우(二里頭)로 이전했다.
타오쓰 초기 왕족 묘지에서 출토된 규척과 입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규표 실물 자료다. 사진은 린펀시 박물관에 전시된 규표 출토 복원 장면이다. 사진/쉬하오
문명 전환 과정에서의 도성
4300년 전 전후로, 중국의 문명 발전 과정에서 거대한 변혁이 일어났다. 이 변혁의 핵심적 특징은 ‘중원(中原)’ 지역의 급속한 부상이다. 중원에 위치한 타오쓰는 이 단계에서 눈부시게 발전했다. 왕웨이 주임은 “4300년 전 타오쓰는 진난 지역에서 하 왕조보다 빠른 정치권력의 중심이 형성됐다”라고 밝히고, “이 권력 중심은 피라미드 형태의 사회구조를 갖추고 일정한 범위에 분포했으며 공권력이 존재했다. 또 관료 체제에 의해 관리되는 수공업이 있었고 채색 도자기 예술을 발전시켰으며 문자를 사용한 초기 문명 사회가 형성됐다”라고 말했다.
허누 연구원은 “40여 년 고고학적 유물을 발굴한 결과, 타오쓰의 초기 유적은 약 4100~4300년 전까지의 시기로 면적은 약 160만 ㎡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13만㎡ 규모의 ‘궁성(宮城)’을 중심으로 남쪽의 ‘하성(下城)’은 하층 귀족의 거주지고 궁성 양쪽은 초기 일반 백성의 거주지였다. 궁성 동쪽은 ‘국고(國庫)’가 있는 창고 터였고, 그 남동쪽은 초기 왕족의 묘지가 있었다. 궁성 밖 북서쪽으로 약 1000m 지점은 땅에 제사를 지내는 ‘택중방구(澤中方丘)’의 지탄(地壇)이 있었다. 타오쓰 중기 유적은 약 4000~4100년 전에 건설됐고 면적은 280만 ㎡ 이상이다. 이 시기에는 궁성과 ‘국고’인 창고 터는 계속 사용됐지만 ‘하성’의 하층 귀족 거주 터는 폐기됐으며 거대한 외곽성을 증축해 궁성-외곽성의 이중 구조를 형성했다. 이것으로 고대 중국 도성의 ‘쌍성제(雙城制)’ 모델이 확립됐다. 타오쓰의 후기 유적은 지금으로부터 약 3900~4000년 전에 건설된 것으로 면적은 300만 ㎡에 달한다. 이 시기에 궁궐터는 폐기되고 성벽은 훼손돼 타오쓰 유적은 일반 거주지가 됐다.
“타오쓰의 280만 ㎡에 달하는 대규모 성터는 같은 시기 황허(黃河) 중류 지역에서 규모가 제일 컸다. 이 시기는 요순시대에 해당된다. 나를 포함한 학자의 상당수가 이곳이 요순의 도성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왕웨이 교수는 “타오쓰 고성은 기능별 구역이 잘 나눠진 완전한 도성급 유적지”라며 “타오쓰의 궁궐 형태와 구조는 후대 궁궐 배치에 큰 영향을 줬다. 타오쓰 1호 궁궐 유적 면적은 6000여 ㎡로 기반을 다진 초대형 토지 위에 건설했다. 이런 구도는 하·상·주 궁실은 물론 이후 명·청의 황궁에까지 이어졌다”라고 말했다.
“한 도읍의 성터 계획과 배치, 철학은 그 사회가 이전 문화를 어떻게 계승하고 발전시켰는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가오장타오 팀장은 “타오쓰 성터는 사전에 계획해 배치한 것이 분명하다”라며 “도성을 궁성과 궁궐터, 창고 터, 묘지, 관상대 제사구, 수공업 작업 터, 일반 주민 거주지 등으로 나눌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얼리터우 유적지도 마찬가지로 핵심지역과 일반지역이 존재하며 궁성 궁궐터, 제사를 지내던 자리, 묘지, 수공업 작업 터 등 기능별 구역으로 나뉜다.
가오 팀장은 이어 “타오쓰와 얼리터우는 배치 계획뿐 아니라 기능 구역의 구체적인 위치와 방향 선택에서도 비슷한 점이 많다. 특히 궁성은 도성 배치의 핵심구역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서 발전과 변화가 있었다. 솽화이수(雙槐樹), 취자링(屈家嶺), 량주(良渚) 등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대형 건축물이나 집터가 집중된 ‘유사 궁궐터’였다면 타오쓰 유적은 ‘궁궐터’ 주변에 점차 성벽을 둘러쌓아 진정한 ‘궁성’을 이뤘고 이것이 얼리터우 궁성으로 이어졌고 다시 옌스상청(偃師商城)의 궁성으로 계승됐다”라고 설명했다.
2018년 타오쓰 유적 궁성 성벽에서 발굴팀이 ‘궐루(闕樓)’식 건축물을 발견했다. 두 개의 궐루가 궁성의 남쪽 성벽에서 뻗어 나갔다. 이런 예의의 문 형태는 수·당 시기 뤄양청(洛陽城) 응천문(應天門) 궐루 양식과 비슷하다. 자금성(紫禁城) 오문(午門)도 4000여 년 전 궐루 양식을 따랐다.
중국 고고학박물관 타오쓰 유물 전시구역에서 관람객이 타오쓰의 채색 용반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텅옌옌
타오쓰인의 ‘정신 문명’
예법은 초기 국가 정치 제도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위정지여, 치국지기(為政之輿, 治國之器)’ 즉, ‘정치를 위한 수레, 나라를 다스리는 도구’라고 불렸다.
가오장타오 팀장은 “타오쓰 대중소형 고분에서 ‘피라미드식’ 배치 구조가 보인다며 귀천이 구분되고 위계질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대형 무덤은 부장품이 풍부하고 정교하며 무덤 주인이 군권과 종족권(族權), 신권을 장악한 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형 무덤의 묘실은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눕힐 수 있을 정도로 작고 부장품도 없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반 백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타오쓰 왕족 무덤에서 채색 도기, 옻칠 목기, 옥기 등 다양한 종류의 예기와 함께 도고(陶鼓)와 타고(鼉鼓), 석경(石磬) 등 예악기가 출토됐다. 특히 주목할 점은 매장 시기가 100여 년 정도 시간 차이가 있는 타오쓰 대형 고분에서도 악기 수량과 조합, 배치 위치가 모두 규격화된 것으로 보아 일정한 규칙과 제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적과 묘지에서 출토된 동령(銅鈴), 용기 입구, 치륜형기(齒輪形器), 환(環, 고리), 두꺼비 모양의 동기(銅器) 등은 중국 선사 시대에서 가장 풍부했던 홍동(紅銅)으로 주조한 동기군을 형성해 ‘금석지성(金石之聲)’의 도래를 예고했다.
타오쓰 사회의 중형 고분은 관(棺), 관외(棺外), 이층대(二層臺) 등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기 다른 기능과 의식을 나타낸다. 관외는 ‘음식’, ‘취사’, ‘생활 공간’ 등 장소의 쓰임새가 뚜렷하다. 이층대에서는 돼지 아래턱뼈가 나온 것으로 보아 매장 과정이 장중하고 엄숙한 부장 의식 속에 치러진 것으로 보인다.
“얼리터우 문화 시기에 이르러 예법이 더욱 발전했고 광범위하게 전파됐다. 옥 예기(禮器) 아장(牙璋)은 중국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됐다. 예기에서 복잡한 예법까지, 타오쓰 사회는 예악 제도의 바통을 얼리터우로 전달했다.” 가오장타오 팀장의 말이다.
예악 제도는 타오쓰인의 정신문명을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허누 연구원은 “타오쓰 유적에서 출토된 악기들은 예악 문명의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도고, 타고, 석경이 조합을 이뤄 팔음이 기본적으로 갖춰졌다. 도고와 타고는 팔음의 혁(革)에 속하고, 석경은 팔음의 석(石), 도훈(陶塤)은 토(土), 동령은 금(金), 목축(木柷)은 목(木)에 속한다. 타고와 석경은 같은 조의 악기로 고(鼓) 2개, 경(磬) 1개로 구성됐으며 토고(土鼓) 한 개가 더해졌다. 타고는 전체적으로 원통형이며 윗부분은 악어가죽을 씌웠다. 고강(鼓腔)은 천연 나무 줄기를 사용해 나무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내 건조시킨 뒤 외부에 색을 칠했다.
허누 연구원은 “정신문명은 관념 문명을 의미하며, 제도 문명은 주로 정치 제도를 말한다. 정신문명에는 자연관, 사회관, 종교관이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이 세 개 관념은 예술과 문자부호의 두 가지 표현 체계가 있다. 자연관에는 과학적인 관점과 우주관이 포함된다. 사회관은 정치 사상, 예법 사상, 계급 의식 등이다. 종교관의 핵심은 하늘, 땅, 조상에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중원 지역은 기본적으로 일정한 체계나 사고방식, 유전자를 갖고 있다.
타오쓰에서는 문자도 출토됐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타오쓰 후기 회갱(灰坑)에서 출토된 편호(扁壺)로 앞면에 갑골문과 금문의 ‘문(文)’ 자와 비슷한 주서(朱書)가 있다. 뒷면에는 다른 주서로 쓴 글자가 있는데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양(昜)’, ‘읍(邑)’, ‘요(堯)’ 등 의견이 분분하다. 이견이 존재하지만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갑골문과 가장 비슷한 문자라고 생각한다. 이는 중국 문자 기원 연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타오쓰의 용(龍)도 후세에 귀중한 유산을 남겼다. 타오쓰 채색 용반은 대형 고분에서만 출토됐다. 타오쓰에서 출토된 용은 여러 동물의 특징을 결합하고 있다. 용을 왕권 및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 개념과 결합해 용에 대한 숭배를 종족이나 국가의 상징으로 발전시켰다. 타오쓰와 얼리터우 사이에는 용의 형상에 있어서 비교적 명확한 계승 관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타오쓰는 예술 표현에 있어서 좀 특이한 편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타오쓰는 예술 표현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기물들이 정교하고 아름답지 않은데, 이 점이 량주와 큰 차이점이다.” 허누 연구원의 말이다.
‘왕조 시대’의 초석을 놓다
최근 타오쓰가 ‘요순의 수도’라는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미지의 것을 추론한다. 예를 들어, 상나라의 존재는 이미 확인됐고 하나라도 믿을만한 역사로 증명됐다. 더 거슬러 올라가 수많은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한 문화는 량주, 타오쓰 더 나아가 룽산, 스자허(石家河) 같은 종족의 실체와 문명 요소였다.” 가오장타오 팀장은 “수많은 고고학적 사실로 봤을 때 타오쓰가 이미 초기 국가 시기로 진입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중국, 화하의 주맥(主脈)’이 느껴지는 기상을 엿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시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문헌에는 요·순·우(禹) 시대에 해당된다고 기록돼 있다. “요·순·우에 대한 기록은 문헌에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마침 우리의 고고학적 발견에도 이 시대에 해당한다. 요컨대 핵심은 ‘대응’의 문제다. 완벽하게 일치하는지 아니면 일부만 일치하는지는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가오장타오 팀장의 말이다.
“중화 문명의 핵심은 황허 중류에 있다. 중화 문명은 다원 일체의 길을 걸어왔고 그것의 핵심은 중원 지역에서 최종적으로 형성됐다. 타오쓰 방국에서 시작해 얼리터우 왕조 국가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타오쓰 방국의 문명은 물질문명, 정신문명에서 제도문명까지 정도와 혁신, 포용과 수용, 융합의 방식으로 중화 문명의 중요한 가치 관념 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이는 결국 중화 문명의 우수한 전통문화 유전자가 됐다.” 허누 연구원의 말이다.
타오쓰가 속한 그 시기에 대해 왕웨이 주임은 ‘해납백천(海納百川)’이라는 말로 요약했다. “타오쓰 문명은 주변의 선진 문명 요소를 흡수하고 집약했는데 이것이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오장타오 팀장은 “그 시기에 다양한 문명 지역과 형태가 존재했지만 다른 지역들이 점차 특정 문명에 대한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문헌 기록이 있고 고고학적 발견도 있다”라고 말했다. 가오 팀장은 이어 “타오쓰 문명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지역 문명의 대표적인 유물들이 타오쓰에서도 발견됐다. 이는 다른 선진 지역의 문명 요소들이 모이는 뚜렷한 양상을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하이다이(海岱) 문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옥월(玉鉞)과 부장한 돼지의 턱뼈 등, 창장(長江) 하류 지역 량주 문화의 옥종(玉琮)과 옥벽(玉璧), 창장 중류의 후 스자허 문화의 옥 장식품, 서아시아에서 황허 상류 지역을 거쳐 들어온 구리 정련 기술 등이다.
“동서남북의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모였다는 것은 타오쓰의 ‘왕’이 각 문명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그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외래문화’의 상징을 자신의 문화로 흡수하고 재창조하는 데에도 개방적이었다. 이 자체로도 천하를 품겠다는 포용력과 개방적인 기개를 드러낸 것”이라며 가오 팀장이 설명을 이어갔다.
얼리터우 시기에 이르러 이미 왕조의 기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는 ‘왕조 시대’로 진입을 알렸다. 얼리터우 문화가 창조한 옥아장(玉牙璋)을 대표하는 예기와 예법 제도는 주변 지역으로 퍼져 나가 전례 없는 영향을 끼쳤다. 얼리터우와 타오쓰는 직접적으로 맞물리지는 않지만 얼리터우는 타오쓰가 창조한 문명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얼리터우는 타오쓰의 도성 제도와 예법은 물론 용 문화와 수공예 등을 계승했다.
“타오쓰 문명은 지금까지 황허 유역에서 초기 문명사회로 진입한 가장 오래된 실증적 증거다. 타오쓰 문명은 하상주는 물론 후세까지 이어져 중화 문명의 다원 일체 발전에 중요한 상징이자 기원 중 하나가 됐다.” 가오장타오 팀장은 “5000여 년 동안 중화 문명이 이어져 온 것은 바로 후대 문명이 이전 문명을 계승하고 발전시켰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 | 쉬하오(徐豪)
최근 중국 게임 ‘검은신화:오공(黑神話:悟空)’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게임 배경 중 한 곳인 산시(山西)성 관광지에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