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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족의 침입(2)


2023-06-06      

동로마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서로마인은 결국 뜻을 이루었을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동로마 장군 벨리사리우스가 동고트를 침공할 때 서로마의 귀족과 백성은 내외로 호응했다. 벨리사리우스는 로마 주교 실베리오의 비밀스러운 도움을 받아 로마에 무혈 입성했다.


로마, 로마를 버리다

서로마인의 ‘자기네의 군대’에 대한 열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고생을 해보지 않은 서로마인은 공방전이 장기화되자 씻지도, 잠도 제대로 못 자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고, 이어진 식량 부족 현상에 동로마 군대를 저주했다. 동로마에게 성문을 열어주었던 실베리오 주교도 밤을 틈타 성문을 열어 벨리사리우스를 습격하도록 고트인의 잠입을 도왔다. 음모가 발각되자 실베리오 주교는 즉시 유배됐다.


비잔틴을 버린 것은 귀족뿐 아니라 평민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서로마 농민과 노예가 옛 주인인 고트족 부대로 돌아갔다. 월급을 못 받은 바바리안 용병도 고트족 군대에 속속 합류해 ‘해방자’를 향해 진격했다.


물론 서로마인이 동로마인을 반대한 이유가 있었다. 비잔틴이 현지 민생을 돌보지 않고 세금에만 눈독을 들였기 때문이다. 전쟁 후 이탈리아 북부는 폐허가 되어 경제가 쇠퇴하면서 인구가 급감했다. 벨리사리우스 다음으로 온 나르세스 장군은 군정부를 설립하고 장장 15년 동안 약탈적으로 세금을 걷었다. 비잔틴 세리(稅吏)는 ‘알렉산더의 가위’라고도 불렸다. 그들이 세금 중 12분의 1을 합법적으로 가져갈수 있다. 이것도 세리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 미친 듯이 세금을 징수한 동력이 됐다. 개인이 국가의 세금 중 일부를 갖도록 하는 ‘조세 청부제’는 마케도니아제국에서 로마까지 이어진 악습이었고, 비잔틴은 이것을 국가 행위로 만들었다. 또한 비잔틴은 로마의 관리 체계를 복구하지 않아 천년 동안 이어진 로마 원로원은 와해됐다.


바바리안인 테오도리쿠스는 로마의 체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로마인인 비잔틴은 오히려 그것들을 싹 폐지했다.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고트 전쟁이 없었다면 로마의 고전문명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고 중세로 진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아무리 로마화를 하고 자애롭든 ‘야만족’ 황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콧대 높은 로마 귀족들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동고트 이후 바바리안은 아예 로마의 정치제도를 버리고 철저하게 자신의 길을 걸었다. 로마의 생활 습관은 관성적으로 유럽 일부 지역에 남아 한 세기 넘게 지속됐다.


중화(中華), 중화를 선택하다

중국 역사에도 테오도리쿠스와 보이티우스의 관계와 매우 비슷한 인물 두 쌍이 있었다. 한 쌍은 전진(前秦)의 부견과 왕맹이고, 다른 한 쌍은 북위(北魏)의 탁발도와 최호다.


부견은 오호(五胡) 중 가장 덕이 높은 군주였고, 왕맹은 북방에서 손꼽히는 명사였다. 왕맹이 부견을 보좌하기로 결정한 이유는 부견이 ‘대일통(大一統)’의 뜻을 세웠기 때문이다. 부견은 저(氐)족 사람이지만 평생 천하 통일을 추구했다. 그는 장안(長安, 현 시안·西安)의 선비족 귀족을 안정시키기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동진 정벌에 나섰다. 그는 ‘통일’을 해야만 ‘천명’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 영웅이었던 부견은 위험을 알고 있었지만 ‘대일통’이라는 목표를 위해 개인의 성패는 따지지 않았다.


왕맹이 부견을 선택한 두 번째 이유는 한족 정권이었던 동진의 정책이 왕맹의 이상과 달랐기 때문이다. 동진은 문벌정치를 행했지만 왕맹은 유가와 법가를 병행하는 한제(漢製)를 추구했다. 법가의 엄정한 법과 혹독한 형벌, 강한 호족을 억제하면서, 유가를 받아들여 어질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고 농업을 발전시키며 예로써 백성을 교화하자는 것이었다.


동진은 문벌에 따라 관리를 임명했지만 부견은 문벌에 따르지 않고 하층에서 인재를 선발해 등용했다. 동진은 현학(玄學)을 하고 정치에서 풍아(風雅)를 추구했다. 반면 부견은 배움을 활용하고 실행으로 나라를 흥하게 하는 것을 주장했다.


저(氐)인의 전진은 한(漢)인의 동진보다 왕맹의 ‘한제(漢製)’에 더 부합했다. 왕맹 같은 사람에게 ‘한(漢)’은 혈통으로 이어진 종족이 아니라 제도화된 이상이었다. 중화 세계에서 족군(族群)은 호족이든 한족이든 로마 세계처럼 ‘혈통’이나 ‘종교’를 족군을 나누는 근거로 삼지 않았다. 테오도리쿠스가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수많은 호한의 호걸이 그를 보좌해 정통을 쟁탈했을 것이다.


탁발도는 선비족의 군왕이고, 최호는 북방 한인 세족 자제로 북위에서 세 임금에 걸쳐 벼슬했고 경서와 사서, 백가를 두루 익혀 전략을 세우는데 능했다. 최호는 탁발도를 위해 계책을 내어 중국 북방 통일을 도왔다. 또한 탁발도에게 ‘문치(文治)’ 개혁을 추진해 군사 귀족이 정무를 주관하는 것을 폐지하고 문관 제도의 상서성을 회복하고 비서성을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기층 정권을 정돈하고 지방 관리의 공무 집행을 시찰하도록 했고, 중원의 율령과 조문을 대량 도입하도록 했다. 이 밖에도 최호는 선비족 엘리트와 한족 엘리트의 대융합에 힘썼다. 탁발도는 그의 제안을 모두 받아들여 한족 명사 수백 명을 중앙과 지방 관리로 임용했다.


탁발도는 최호를 매우 신임해 그의 관저를 직접 방문해 군사와 국정의 대사를 물었고, 악공에게 그의 공로를 치하하는 곡을 만들라고 명하기도 했다. 선비족 귀족들은 탁발도가 최호를 편애하는 것에 큰 불만을 가졌고 심지어 흉노 귀족과 선비 귀족들이 공모해 정변을 일으켰다가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보이티우스처럼 최호도 족군 의식 때문에 끝이 좋지 않았다. 최호는 책임지고 ‘북위사(北魏史)’ 편찬을 주관하면서 선비족 부락 시대의 낙후된 풍습을 기록했고 이것을 비석에 새겨 도성의 주요 길목에 세웠다. 선비족 사람들은 이런 ‘결점을 폭로하는’ 행위에 매우 분노했다. 마침 남조(南朝) 송(宋) 문제가 북벌을 하자 선비족 귀족들은 최호가 조상을 욕보였다고 고발했고, 최호가 송에 투항하려고 한다며 음해했다. 최호의 가문이 너무 방대해 친가와 인척이 남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탁발도는 대노하여 최호를 멸문시켰다.


그러나 한족과 선비족의 융합은 최호 사건으로 갑자기 중단되지 않았다. 최호가 멸문 당한 뒤에도 그의 방계 친척들은 북위에 남았다. 효문제가 즉위한 뒤 최씨의 후손인 최광과 최량 등이 북위에서 관직을 했다. 특히 최홍은 잔존한 각종 사료를 다 모아 100권으로 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를 쓰고 오호 각 정권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


고트가 로마인의 배신으로 급속하게 탈 로마화된 것과는 달리 탁발도는 최호 사건때문에 하던 노력을 폐기하지 않았고 선비족 귀족 자제에게 유학을 배우라고 명령했다. 이후 효문제 때 한화(漢化) 개혁이 절정에 달했다. 한족과 선비족은 개인의 영욕으로 정치 체계를 구축하지 않았다. 그들이 역사를 더 깊이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판웨의  <중국 오호의  화하 진입과 유럽 바바리안 침입(中國五胡入華與歐洲蛮族入侵)>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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