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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국가


2023-01-28      

서로마제국의 마지막 150년 동안 국교는 기독교였다. 원시 기독교는 중동지역의 팔레스타인에서 생겨난 ‘어부와 농민’들의 소박한 종교였다. 이들 하층 빈곤민은 로마의 속주가 신경 쓰지 않았던 계층이었고, 기독교인들도 로마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속한 형제들이었지 ‘가이사의 나라’의 공민은 아니었다. 그들은 병역을 거부하고, 공직을 마다했으며, 로마의 다신교 제사와 황제의 조각상에 절하는 것을 거부했다.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로마 본토의 다신교는 도덕 규범이 엄격하지 않아 로마 사회의 타락을 막을 수가 없었다. 로마는 빈민층을 모른 척한 반면, 기독교 신자들만 고아와 노인을 돌봤고, 빈민을 방문해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으며, 역병으로 숨진 사람들을 묻어주었다. 조금씩, 평민뿐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사회 엘리트들도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다.


기율이 엄격한 기독교는 변방 도시와 야만족 지역에서 기층 조직을 구성했고, 군대와 궁정에서도 신자가 늘어나 로마 체제 안에서 강력한 ‘보이지 않는 국가’를 형성해 나갔다.


로마의 집권자는 기독교의 강력한 조직력과 정신력에 공포를 느끼고 300년 동안 박해를 가했다. 서기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유화책으로 돌아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했다. 서기 392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식 확정했다.


로마는 왜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을까? 하층민과 사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고 하는 역사가도 있고, 일신교가 절대 황권 수립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 역사가도 있다. 이유가 어찌됐든 로마 황제들의 바람은 모두 물거품이 됐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합법화하고 40년이 흐른 뒤(서기 354년) 로마 관사 가정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는 로마의 엘리트 양성 과정에 따라 교육을 받았다. 그가 처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 단순하고 소박한 문장에 “이 책은 키케로의 우아한 문장에 비해 정말 보잘것 없다”고 폄하했다.


30세가 되던 해, 그는 로마 궁정의 공공 연설가가 되어 황제를 칭송하고 정책을 선전해 그리스 로마 고전 문명의 ‘불꽃 전승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풍족한 생활, 자유로운 사상, 여유로운 환경, 지극히 낮은 개인의 도덕 기준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결핍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성경>을 읽었고 형언할 수 없는 ‘신의 계시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가 바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기독교 원시 교의를 방대한 신학체계로 발전시켰고, 원죄, 신의 은총, 예정설, 자유의지 등 사상을 기독교 철학으로 집대성했다.


서기 410년 서고트족이 로마를 함락시켰다. 그러자 로마인들 사이에서 로마가 외래 기독교를 받아들여 ‘벌’을 받은 것이라는 말이 퍼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De Civitate Dei)>을 써서 반박에 나섰고 로마 문명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는 로마는 정의를 실현한 적이 없고 ‘공민의 사업’을 실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공화국이 아니라 그저 ‘거대한 도적 집단’에 불과하다고 질책했다. 그는 심지어 초기 로마 전사의 ‘애국이 영광’이라는 정신을 부정하면서 모든 영광은 신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말에서 로마의 함락은 자업자득이며 기독교 신자의 마지막 희망은 신의 나라라고 했다.


‘국가의 악’과 ‘국가의 선’

중국인의 관점에서 보면 로마가 아무리 나빠도 모국이다. 국가가 부패했다면 제도를 개혁해 정신을 바로 세우면 되지 않을까? 외부의 다른 민족에게 침략당하면 일단 먼저 나라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 어째서 국가 개선이라는 책임을 다하기도 전에 모국을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됐지만 로마와 운명을 같이하지 않았다.


이는 한(漢)나라와 로마의 또 하나의 다른 점이다. 한나라 유가 정치의 도덕 윤리에 따르면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 없는 노인을 돌보는 것’은 정치가의 당연한 책임이다. 또한 한나라가 취한 법가의 기층 통치에서도 ‘국가는 정의롭지 않은 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중국에서 일신교는 로마처럼 발전하기 어려웠다. 유가 신앙이 자연의 이치와 인륜을 포함하기 때문에 유가는 귀신을 존중하지만 멀리 하며 인문 이성으로 나라를 세우고 종교를 근간으로 하지 않은 고대 중화 문명을 만들었다. 중국에 유입된 외래 종교는 배타성을 버리고 국가 질서와 조화롭게 어우러져야 했다. 기독교가 로마에 유입된 비슷한 시기에 불교가 중국에 유입됐다. 중국은 불교에 대해 로마가 기독교에 했던 것처럼 학살이나 진압을 하거나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선종(禪宗)’을 만들어냈다.


기독교의 ‘신의 나라’는 속세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지만 중국의 천도(天道)는 속세에서 실현해야 한다. 유가 사상과 국가 의식은 하나로 융합됐다. 유가 정신이 스며들면서 중국화된 종교는 ‘국가 가치’에 대해 깊이 동감했다. 도교는 천하 태평의 이상이 있고, 불교 역시 정치가가 국가를 잘 통치하는 업적이 고승의 공덕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철학 분야에서 기독교 이전의 그리스철학은 개체도 있고 전체도 있었지만 중세라는 1000년 신권 압제를 거치면서 서양 철학은 ‘개체 의식’과 ‘전체에 반항’하는 것에 집착하게 됐다. 반면 중화 문명은 신권의 압제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철학은 개체 의식에 대한 집착이 없고 전체의 질서에 더 관심을 가졌다.


현대 서양 정치에서 ‘국가를 악으로 삼는’ ‘소극적인 자유’ 정신은 기독교의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분리에서 비롯됐다. 기독교는 ‘로마 국가’를 악으로 봤다. 이후 천주교도 ‘악’이라고 여겨져 종교 개혁의 대상이 됐다. 하느님 외에 ‘인간은 모두 죄인’인 속세에서는 ‘인간’이 만든 조직이 다른 인간을 이끌 자격이 없다. 로크의 사유재산권을 보호하는 ‘유한 정부’에서 루소의 공공의지를 기반으로 한 ‘사회 계약 정부’까지, 다시 아담 스미스가 ‘야경꾼’ 역할만 해야 한다고 했던 정부까지 모두 ‘국가의 악’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중화 문명은 ‘국가의 선’을 믿었다. 유가는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있어 어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을 본받으려고만 하면 자기 개선을 통해 더 나은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봤다. 한나라가 유가와 법가를 병행한 이후 태평성세가 이어졌고, 이는 자국인의 기억과 ‘좋은 국가’로 전환하겠다는 신념을 통해 역대 왕조와 시대에 면면히 계승됐다. 


이 글은 판웨의 <진·한과 로마(秦漢與羅馬)>에서 발췌한 것이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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