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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서양의 상도(商道)


2022-11-16      

중국의 상공(商工) 문명은 시작부터 유가의 도덕 윤리에 속박당하고, 이후 가정과 국가의 책임에 속박 당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이중 속박 때문에 중국에서는 서양식 기업가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 윤리와 가정과 국가에 대한 책임은 오늘날 서양 기업가들이 반드시 대답해야 할 문제다. 순수한 사적 이익이 저절로 사회의 공동 이익을 이룰 수 있는가, 국가와 개인 간 이익의 경계를 어떻게 정확하게 구분할 것인가, 자유경제는 국가 주권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등 중국은 2000년 전부터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진 정치(仁政)에 대한 부담

2017년 여름, 중국-몽골 합동 고고학팀이 몽골 항가이산의 한 붉은색 석벽에서 마애석각(摩崖石刻)을 발견했다. 학자들은 이것이 많은 고서에서 언급한, 한나라가 흉노(匈奴)를 대파한 뒤 만든 ‘연연산명(燕然山銘)’이라고 확정했다.


이 비문은 로마 제국에게도 매우 중요하다. 한나라가 흉노와의 200년 공방전을 끝내서 흉노가 서쪽으로 향했고 중앙아시아 초원 민족의 서쪽 이동이라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흉노는 왜 서쪽으로 이동했을까? 2013년 미국 고기후학 전문가인 에드워드 쿡(Edward R. Cook)은 흉노의 서쪽 이동은 기후변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서기 2~3세기,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 초원은 100년 동안 심각한 가뭄에 시달려 유목 민족은 생존할 수가 없어서 중국 쪽으로 남하하거나 유럽이 있는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흉노는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 초원에 있는 유목 민족과 함께 다른 농업문명의 중심인 로마로 향했고 결국 서로마 제국을 와해시켰다.


한나라가 흉노의 남하를 막지 못했더라면 동아시아사와 세계사는 다시 써야 했을 것이다. 한무제(漢武帝)는 즉위 7년 뒤(기원전 133년) 흉노의 지속적인 침범을 견디다 못해 12년 한흉(漢匈)전쟁을 시작했다. 결국 곽거병(霍去病)이 나선 하서(河西) 전투에서 흉노의 혼사왕(渾邪王)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한무제는 그들을 변경지역에서 살도록 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온갖 악행을 저지른 흉노에게 조정이 재물을 들여 부양하고 한나라 백성에게 그들을 돌보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근본을 해치는 일이라고 간언했다. 한무제는 깊이 생각한 끝에 황실에서 돈을 내어 흉노인이 자리잡도록 도와주라고 했다.


한나라는 왜 패전한 자들을 노예로 삼지 않고 오히려 자기 돈을 들여 부양했냐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유가의 ‘어진 정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한나라가 바랐던 것은 흉노인의 마음이 귀순하는 것이었다. 흉노인이 진심으로 귀순한다면 중국 백성이 되는 것이고 인의(仁義)와 재화를 들여 그들을 대해야 한다.


그러나 ‘어진 정치’의 부담은 너무 컸다. 중원과 초원이 모두 재해를 입자 소농들이 파산했고 그들은 생계를 위해 거상에게 전답과 집을 팔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득을 취한 투기상과 대지주는 국가의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조정이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돈을 빌려 달라고 하자 그들은 조정이 승산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때문에 조야(朝野)는 농업과 상업의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노력했다. 법가 사상은 ‘중농억상(重農抑商)’을 제시했지만 상업은 한나라 번영의 기반이었다. 유가에서는 농업세 감면을 제시했지만 세수를 줄이면 중앙 재정은 무슨 돈으로 재해와 전쟁에 대비한단 말인가?


한무제 때에 이르러 상홍양(桑弘羊)이라는 상인이 이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했다.


학자 출신 상인이 보여준 가정과 국가에 대한 책임

상인 집안 출신인 상홍양은 13살 때 입궁해 16살이었던 유철(劉徹, 한무제)과 함께 공부했다. 20년 뒤 상인들이 다시 한번 기부를 거부하자 분노한 유철은 상홍양의 계획을 받아들여 서기전 120년 전국에 제염과 주철 경영권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소금과 철은 고대사회의 최대 소비품으로 국가가 최대 자원을 독점해 버린 것이다.


이 밖에도 상홍양은 ‘균수법(均輸法)’과 ‘평준법(平準法)’을 고안해 냈다. 균수법은 각 지방에서 가장 풍부한 물품을 조정에 공물로 진상하고 조정은 조정에서 운영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해당 물자가 귀한 곳에 판매해 농업세를 늘리지 않고도 막대한 재산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평준법은 조정이 운영하는 네트워크로 가격 파동을 해결하는 것이다. 어떤 상품의 가격이 폭등하거나 폭락하면 조정이 시장에 판매하거나 매입해 물가를 안정시켰다.


또한 상홍양은 화폐를 통일해 각 군국(郡国)에 분산됐던 조폐권을 국가로 회수했다. 그가 만든 거시 조정 정책과 중앙 재정 시스템은 한나라가 농업 재해와 흉노의 침입에 대항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한나라가 수많은 성과를 이루는 데 경제적 뒷받침이 됐다.


상홍양은 상인의 기질은 물론 유가 정신도 갖고 있었다. 그는 개인 재산을 둔전(屯田) 개발과 홍수 관리에 투자해 국가의 ‘천하 경영’을 도왔다. 상인으로서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의 상업제국을 건설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의 이익 외의 천하를 구제해야 할까? 상홍양은 후세 중국 상인에게 ‘상도 사명’이라는 영원한 화두를 남겼다.


중국과 서양 상도의 차이

상홍양과 동시대에 있던 로마 제국 최고의 거상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였다. 그는 ‘로마 최고의 갑부’였다. 크라수스는 로마에 소방대가 없다는 것에 착안해 500명으로 구성된 개인 노예 소방대를 만들어 부를 축적했다. 어떤 집에 불이 나면 그는 부하들과 함께 가서 집주인에게 저렴한 가격에 집을 팔라고 했다. 집주인이 팔겠다고 하면 불을 꺼주고, 안 팔겠다고 하면 타도록 그냥 놔두었다. 집주인이 어쩔 수 없이 싼값에 집을 넘기면 그는 그제야 불을 끄고 집을 수리해 피해자인 원래 주인에게 고가에 되팔았다. 이렇게 그는 ‘불이 난 것을 이용해 한몫을 잡는’ 방법으로 로마의 건물 대부분을 사들였다. 크라수스는 또한 로마 최대의 노예 판매상이기도 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로마의 연간 재정 수입에 달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제국 원정 길에서 사망했다. 그가 파르티아 제국 원정에 나선 이유는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로마에는 새 도시를 점령하는 자가 그곳의 재물을 차지하는 관행이 있었다. 크라수스 같은 상인 정치가가 중국에 있었다면 그가 부를 축적한 방식은 중국 상계에서는 존중받지 못하고, 정치 지도자는 더더욱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개인이 군대를 무장시키고, 선거 때 표를 확보할 만큼 재산이 충분하다면 정계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근대 들어 일각에서 중국의 상업정신이 유가 농업문명의 지류라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의 상업정신은 유가 농업문명의 중요한 부분으로 유가 사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유가 사상을 실질적으로 수정한 것이다.


일찍이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 재상 관중(管仲)은 시장으로 부를 조절하고, 화폐로 가격을 매기며, 이익 메커니즘으로 사회적 행위를 이끌고, 행정 수단으로 통제하는 것에 반대했다. 이런 사상은 매우 현대적이다. 이로써 중국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출현하지 않은 것은 상공문명의 씨앗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다.


글|판웨(潘岳), 역사학 박사이고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통일전선사업부(中央統戰部) 부부장, 중국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당조(黨組) 서기이며, 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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