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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용, 고금의 장인 지혜가 담긴 문화유적


2021-11-23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황제는 누구일까?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득표수가 제일 많은 ‘후보’ 중 하나는 진시황이다.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황제로 중국 대통일의 기본 판도를 다졌다. 진 제국은 사라졌지만 진 왕조의 위세는 독특한 방식으로 진시황 곁을 지키고 있다.


고급 갑옷을 입은 군리용(军吏俑) 사진/장톈주(张天柱)


1974년 3월, 산시(陝西)성 린퉁(臨潼) 시양(西楊)촌 주민이 우물을 파다가 흙 속에서 부서진 도용(陶俑) 8개를 발견했다. 그 뒤로 고고학자들이 탐사 및 발굴 작업에 나섰고, 병마용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여 년 동안 진시황 곁에서 깊이 잠들었던 지하 군대가 마침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자크 시라크 프랑스 전 대통령은 “진나라 병마용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고 할 수 있다. 피라미드를 보지 않으면 이집트에 갔다고 할 수 없듯 병마용을 보지 않으면 중국에 갔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산시성 시안(西安)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리(骊)산 아래 위치한 진시황릉 병마용을 꼭 참관해야 한다. 특히 저녁노을이 퍼지는 가운데 침묵하는 군대를 바라보면 진 제국의 그림자를 볼 수 있다.

 

병마용을 관람하는 관광객 사진/장톈주


제국의 위엄과 번영 재현

고대 중국인은 ‘세상을 떠났더라도 살아있을 때처럼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 가는 법인데 생전의 모든 것을 지하로 가져가면 사후 저승에서도 부유하게 산다고 여겼다. 군대는 제국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으로 ‘대통일’을 이룬 황제인 진시황은 제국의 기둥인 군대를 무덤으로 가져갔다.

 

고고학자들은 진시황릉에서 총 3개의 병마용갱을 발견했다. 3개의 병마용갱에는 7000여 개의 도용, 100여 대의 전차, 400여 필의 도마(陶馬), 수십만 개의 병기가 있다. 가장 장관인 곳은 ‘1호갱’이다. ‘1호갱’에 들어가면 마치 진 제국의 군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00여 년이 흘러 병마용은 부서진 것이 많지만 거대한 진용은 호방한 위세를 전혀 잃지 않았다.

 

갱 맨 앞에는 210개의 무사용이 있다. 머리에 장관(長冠)을 쓴 군리용(軍吏俑) 총 3개 외에 나머지는 모두 전투복을 입고 손에 강노(強弩)를 든 병사다. 이는 개전 시 일제히 화살을 발사해 적군의 진격을 교란하여 자기편 후방의 주력군이 순조롭게 돌격하도록 하는 전술이다.

 

뒤에 있는 9개 구덩이에는 갑옷과 전투복을 입은 전차용이 종대로 줄지어 있다. 규모가 가장 큰 부분으로 보이는데 앞의 용사들이 적을 물리치면 뒤에 있던 이 대군이 쏟아져 나와 백병전을 벌여 적장을 참수하고 적을 사로잡는 전투 상황을 만든다.

 

진릉(秦陵) 2호 동차마(銅車馬) 사진/장톈주


군진 남북 양쪽에 있는 무사용은 갑옷이나 전투복을 입고 손에 경노(勁弩)를 든 채로 주위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이는 방진의 ‘양익(군진 양측의 진영)’일 것이다.

 

뒤쪽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지만 고고학자들은 횡대로 정렬한 갑사가 대군을 등지고 세 줄로 늘어서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는 방진의 ‘후위’로 적군의 포위 공격을 막으려 설치한 것이다.

 

이는 전형적인 방진 구도다. 방진의 차마와 무사용은 선봉, 양 날개, 후위, 주체 등을 갖고 있고, 이는 방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갱도 전체를 내려다보면 정확하게 대열을 맞춰 선 방대한 모습에서 진 제국 군대의 조직 방식과 무기 장비, 고대 전쟁의 진법을 알 수 있다. 이 침묵의 군대는 2000여 년 전 육국(六國)을 휩쓴 기세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병마용은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도용은 진짜 사람과 말을 모방해 제작했다. 도용은 키가 1미터 75센티미터에서 1미터 95미터로 진나라 장군의 이미지로 주조해 건장한 체격과 균형 잡힌 체형이지만 옷차림과 형태는 모두 다르다. 헤어 스타일만 해도 여러 종류가 있고 손 자세도 각양각색이며 얼굴 표정은 전부 다르다. 그들의 옷차림, 표정, 손 모양으로 관리인지 병사인지, 보병인지 기병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 진나라의 주조 기술 수준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사실 진시황릉에는 병마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시황릉원 내에서 크고 작은 순장갱 180여 곳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것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고고학자들은 진시황릉원 면적이 약 56㎢라고 추정했다. 이는 고궁(故宮) 78개에 해당한다. 저승에서도 인간세상에서 누리던 부귀영화를 지속하려고 진시황은 군대를 상징하는 병마용을 자신의 무덤에 재현했을 뿐 아니라 아끼는 사물들도 갖고 들어갔다.

 

진시황릉에서는 진나라 궁정 오락 경기를 반영한 백희용(百戲俑)도 볼 수 있다. 백희용은 손에 장대를 들거나 큰 솥을 들고 있다. 현지 기예단의 공연을 볼 기회가 있다면 기예단이 보여주는 프로그램에서 2000여 년 전 백희용의 자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진시황릉에는 백조와 두루미 등 청동제 물새가 있고 옆에는 선음(仙音)을 연주하는 앉은 자세의 도용도 있다. 이는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진시황의 꿈을 나타낸다.

 

동일한 능원에 진시황은 물론 백관과 전사, 후궁이 매장돼 있고 능원을 만든 인부들과 진귀한 보물도 많이 묻혀있다. 황릉의 핵심 건축물은 거대한 봉토 아래에 있는 지하궁전이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아 역사 기록으로 모습을 추측할 뿐이다.

 

‘3호갱’에서 발굴된 병마용  사진/왕레이(王蕾)


서한(西漢)의 사학가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 따르면 진시황릉에는 암노(暗弩)와 여러 함정이 설치돼 있다. 또한 지하궁전에 수은으로 강과 호수,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덤은 진시황제가 휴식하는 곳이면서 진 제국의 축소판이다. 진시황릉 탐사와 발굴은 아직 진행 중이며 진시황릉의 수많은 수수께끼도 풀리길 기다리고 있다.

 

심혈을 기울인 발굴과 복원

세계 최고의 직업은 무엇일까? 한 동안 이런 영상이 중국 인터넷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이 영상에서 한 문물 촬영가가 병마용을 찍는 일이 세계 최고의 직업이라고 말했다. “도용을 찍는 일은 인물상을 찍는 것 같다. 그들의 눈을 보면 그들의 호흡이 느껴지는 것 같다.”

 

병마용 복원 작업자를 부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이 가까이에서 이 진귀한 문물을 접촉하고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복원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1974년 시양촌 주민이 우물을 파다가 천 년 도용을 발견한 이래 진시황릉의 발굴 작업과 도용 복원 작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병마용을 갓 출토했을 때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 거의 없어서 작업자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파편을 하나하나 맞춰서 복원해야 했다.

청동학 사진/장톈주


병마용 복원은 도대체 얼마나 어려운 작업일까? 파편 수천 개가 땅에 흩어져 있다고 생각해보라. 작업자는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 파편 손상을 막으면서 그 중에서 맞는 부분을 찾아 완벽한 개체로 맞춰야 한다. 복원 과정은 정리, 채색 보강, 제작 기술 기록, 제도, 맞추기, 접합, 끼워 맞춤 등 여러 단계가 있다. 모든 단계를 신중하게 해야 하며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모든 작업 처리가 끝나면 ‘살아있는’ 병마용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80년 12월 진시황릉 봉토 근처에서 출토된 ‘진릉 동차마(秦陵銅車馬)’이다. 청동 마차 두 대는 발견만으로도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이 청동 마차는 세계 고고학사에서 가장 큰 청동기로 청동 마차 두 대의 무게가 2.3톤에 달했고 형태는 진짜 마차의 2분의 1이었다. 현재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의 ‘청동지관(青銅之冠)’ 전시장에 이 유물이 전시돼 있다. 살아있는 듯 생생한 청동 말 여덟 필과 마부의 머리부터 발까지 세세한 부분이 다 보여 현대 최고의 조각가들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보는 유물은 복원사들이 장장 8년 동안 복원해 완성한 것이다. 이후 통계를 내보니 진시황릉 청동 마차의 전체 부품이 7000여 개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에서 우리가 보는 병마용은 모두 도토(陶土) 재질이다. 사실 원래 병마용은 채색이 돼있었다. 통계에 따르면 병마용 복식에 분녹(粉綠), 주홍, 조홍(棗紅), 분홍, 천람(天藍), 백색, 자석(赭石) 등 10여 종의 색채가 쓰였다. 병마용 채색은 고대 장인들의 기술과 지혜의 결정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2000년 동안 지하에 묻혀 있어서 대부분의 색채가 날아가버렸다. 게다가 초기 발굴 과정에서 채색과 병해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보호 처리에 만전을 기했음에도 남아있던 색채가 탈락됐다. 고고학 관계자들은 두 눈을 멀쩡히 뜬 채로 눈앞에서 색채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작업자들은 발굴 과정에서 채용(彩俑)이 나타날 가능성을 염두하고 있다. 소식에 따르면 발굴 과정에서 채색 부분이 발견되면 정리 작업을 즉시 중단한다. 이어서 작업자들이 채용에 보습 처리를 해 색채 탈락을 막고 전체를 포장해 실험실로 옮긴다. 실험실은 습도와 온도 조절이 쉬워 작업자는 이곳에서 정리를 시작하고 정리 과정에서 보강해 나간다. 발굴 작업이 개선돼 이제는 현지 박물관에서 채색 장군용을 볼 수 있다.

 

1987년 유네스코(UNESCO)는 진시황릉(병마용갱 포함)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현재 병마용은 진시황릉에서 나와 세계로 나가고 있다. 수십 년 동안 병마용은 49개 국가와 지역의 178개 도시에서 전시됐고 2000만명이 넘는 해외 관객이 전시장을 찾았으며 현지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진시황릉 병마용 전시회는 투탕카멘, 사해문서, 폼페이 등처럼 전 세계 유물 전시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전시품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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