建党百年 banner 222_01_副本.jpg

현재 위치 :  >> 사회·문화 >> 본문

한유와 고대 조선반도


2021-08-17      

중국 허난성 멍저우시 한위안(韓園)내에 위치한 한유 사당과 무덤 

 

한유(韓愈, 768년-824년),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하양(河陽, 지금의 허난(河南)성 멍저우(孟州)시) 사람으로 ‘당송(산문) 팔대가(八大家)’의 으뜸으로 불린다. 한유는 <마설(馬說)>과 <사설(師說)> 등 저명한 글을 많이 남겼고, 그의 글은 중국 초등학교∙중학교 어문(語文,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한유가 후세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글이 철저한 분석과 치밀한 논리, 아름다운 문장 외에 평생 유가 가치관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유의 글이 조선반도(한반도)에 전해지자 문인들의 주목과 애정을 받았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한유의 <삼기론(三器論)> 중의 구절 ‘귀천인지심, 흥태평지기, 시비삼기지능계야(歸天人之心, 興太平之基, 是非三器之能系也,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돌아오게 하고 태평성세의 기반을 흥하게 하는 것은 결코 세 가지 기물이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를 인용해 신라의 사치 풍조를  비판했다. 세 가지 기물이란 명당(明堂), 옥새(玉璽), 구정(九鼎)을 말한다. 동시에 고려 통치자에게 국가를 잘 통치하려면 허례허식에 치우치지 말고 백성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경고했다.

 

고려 시대 조선반도는 불교를 숭상했다. 그러나 불교 사원이 토지와 인구를 점유하고도 세금을 내지 않아 국가의 경제 부담이 점차 가중됐다. 때문에 문신들은 불교 억제를 바랐다. 한유는 <간영불골표(谏迎佛骨表)>를 써 당 헌종이 불골(佛骨, 부처의 유골이나 사리)을 궁으로 들여오려는 것을 반대했다. 고려의 문신들은 한유의 사적과 글을 들어 설명했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고려 공양왕이 승려 찬영(粲英)을 입궁시켜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으나 윤소종과 성석린 등 문신의 반대에 부딪쳤다. 문신들은 상소에서 한유가 당 헌종이 불골을 궁으로 들여오는 것을 반대한 예를 들어 국왕이 지나치게 불교를 숭상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가학설이 국교의 위상에 오르자 한유도 중요시됐다. 조선왕조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기록에 따르면 공자에 제사를 지내는 ‘문선왕묘’에 ‘창려후(昌黎侯) 한유’의 위패를 배향했다. 한유의 문집 <한창려집(韓昌黎集)>도 조선반도 각지로 퍼졌다. 조선 성종도 한유를 좋아해 한유의 율시 <희설(喜雪)>을 필사하고 대신들에게 호응하도록 했다.

 

이 밖에 한유의 글은 조선왕조의 사법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추관지(秋官志)>에는 영조 시대 충청도 감사 이종백의 사례가 기록돼 있다. 박성창이라는 자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빼앗은’ 원수 최득천을 살해한 사건에 대해 이종백은 박성창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모의 복수는 이치에 맞다고 생각했고, 또한 한유의 <복구론(复雠論)>을 들어 자신의 관점을 뒷받침했다. 예조판서 송계명도 이를 찬성했다. 결국 관아는 ‘관청에 고하지 않고 마음대로 살해했다’는 죄명으로 박성창에게 ‘장 60대’ 처벌만을 내렸다. 이후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에게 효를 다했다고 박성창을 대대적으로 표창했다.

 

한유는 고대 조선반도에서 유가 정통 문인의 전형이 되어 정부와 문인의 공경과 추앙을 받았다. 현대에도 한유의 글은 한국의 중국어 학습자에게 중요한 학습본이다. 

 

 

글|위셴룽(喻顯龍), 상하이(上海)외국어대학교 글로벌문명사연구소 전임연구원

 

 

 

 

240

< >
红色 飘带 党 政府工作报告_05_副本gg.png

‘기댈 곳 있는 노년’에서 ‘즐길수 있는 노년’으로

일반적으로 한 사회에서 총인구 중 60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이거나 65세 이상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7% 이상일 때 해당 사회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했다고 간주한다.

읽기 원문>>

방역 일상화 속 활기차게 발전하는 중·한 ‘비대면 경제’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