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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산 고건축군에 담긴 ‘천인합일’ 사상과 도교의 숨결


2021-08-16      글|장진원(張勁文)

무당산 천주봉 건축군 조감도  사진/ 톈메이(田梅)


무당산(武當山)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진융(金庸)의 무협소설에 나오는 무당파(武當派)와 장삼풍(張三豐)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무당산의 가장 소중한 유물은 역사적 인물이 아닌 현재까지도 명성을 이어오고 있는 고건축군(古建筑群)과 그 안에 담긴 중국의 도교(道敎) 문화라 할 수 있다.

 

후베이(湖北)성 스옌(十堰)시 단장커우(丹江口)에 위치한 무당산은 도교의 대표적인 성지로 꼽힌다. 산중에는 무당산의 고건축군을 이루는 황실의 도교 사원이 빼어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당산 고건축군에 대해 세계유산위원회는 “무당산의 고건축 중에 있는 궁궐과 사당은 중국 원(元)·명(明)·청(淸) 세 시기의 풍속과 종교 건축의 건축학적, 예술적 성과가 집약돼 있다”고 평가하고 했다. 무당산의 건축군은 황실이 직접 조성하고 담당 관리를 파견했으며, 황실의 건축 규정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중국 문인들의 표현에 따라 ‘선산경각(仙山瓊閣, 신선이 살고 있는 꿈속의 누각)’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의 고대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담고 있어 ‘중국 고대 건축의 성과를 집대성한 박물관’이자 ‘절벽 끝에 걸친 고궁’으로도 묘사된다.

 

자소대전  사진/ 중국 공산당 스옌시위원회 무당산특구 공작위원회 선전부 제공


자연과 하나된 ‘선산경각’

자연을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중국인들의 태도에 관한 기원은 ‘도(道)’에 대한 믿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춘추전국 시기 노자(老子)라는 동양의 지혜로운 철학가는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도가 사상’을 정립했다. 노자는 ‘도’를 천지의 어머니이자 세계의 근원, 텅 비고 형태가 없지만 독립적인 존재, 끊임없이 운행하고 절대 불변하며 천지만물의 변화를 아우르는 자연의 법칙이라 여겼다. 따라서 ‘도’의 궤적을 좇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야 만물 역시 비로소 온전함과 조화로움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후 ‘도’를 기본 바탕으로 중국 문화에서 복합적인 도교 형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무당산의 고건축에는 ‘인간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으며,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는 도교의 근본 신앙과 핵심 교의가 들어 있는데, 여기는 자연의 조화, 인간과 자연의 조화, 인간 자신의 내외부 조화를 아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무당산은 72개의 낮은 봉우리가 최고봉을 둘러싼 구조로 이뤄져 있다. 주봉(主峰)인 천주봉(天柱峰)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배열된 72개의 봉우리는 깊은 계곡과 옅은 운무에 덮여 기묘한 풍경을 연출하며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여기에 굽이쳐 흐르는 시냇물과 울창한 숲, 각종 희귀동물까지 더해 신비로운 자연의 세계를 보여준다. 수백 개의 도교 건물로 이뤄진 무당산 건축군은 천주봉의 주요 건물인 금전(金殿)을 중심으로 관도(官道·옛날 관서가 관리하는 도로)와 고신도(古神道)를 축으로 삼아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수백 개의 건축물은 각각 약 100km에 달하는 세 줄의 건축선에 있어 평지에 있든 하천에 있든, 산봉우리나 비탈길에 있든 자연과 혼연일체된 절경의 느낌을 주기 때문에 세계 건축사의 기적으로 평가된다.

 

무당산의 도교 사원 건축군 가운데 고건축군 설계의 대표적인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자소궁(紫霄宮)의 보존 상태가 가장 좋다. 차를 몰고 무당산 전기봉(展旗峰) 산자락에 도착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면 청석(靑石·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 난간에 둘러싸인 푸른 물 위로 초승달처럼 부드러운 아치를 그리는 석교(石橋)가 놓여 있다. 바로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못과 다리인 우적지(禹跡池)와 우적교(禹跡橋)의 모습이다.

 

다리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면 자소궁의 정전(正殿)인 자소대전(紫霄大殿)이 나온다. 이곳은 무당산의 유일한 중첨헐산정(重檐歇山頂, 중첨은 겹처마 지붕, 헐산정은 하나의 정척(正脊), 네 개의 수척(垂脊), 네 개의 창척(戗脊)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물 형태) 목조 구조 전당이다. 자소대전에서 좀 더 위로 올라가다 보면 용호전(龍虎殿)이 등장한다. 현산정(懸山頂, 지붕의 전후가 양면이고, 산옥(山屋)면이 산장(山墙) 또는 트러스에 걸려있는 건축) 형태의 건물과 두공(斗拱 · 지붕받침) 구조의 처마(勾檐), 붉은 벽에 녹색 유리 기와지붕의 색감이 두드러지고 문 바깥 양쪽으로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는 듯한 팔자(八字) 형태의 벽은 도교와 세속적 풍경이 결합된 형태를 띠고 있어 장엄한 동시에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멋을 느낄 수 있다. 자소궁의 구조상 관람객들은 처음 탁 트인 공간에서 시작해 위로 올라갈수록 공간이 점점 깊고 좁아지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끝없는 자연과 우주의 속성이 느껴져 절로 감탄이 나오는 순간이다.

 

차를 몰고 차선의 끝까지 올라가 보면 남암(南巖)에 있는 남암궁(南巖宮)에 도달한다. 독양암(獨陽巖) 아래에 위치한 남암궁은 산세가 가파른 곳에서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는 독수리의 양 날개를 연상시키듯 웅장한 형태로 되어 있다. 남암궁의 건축물은 산세와 잘 어우러져 압도적인 풍경을 만들어 낸다. 남암궁을 멀리 바라보면 깎아지른 듯한 바위굴 틈으로 건축물이 자리한 모습이 마치 천길 낭떠러지에 공중누각이 들어선 모습을 방불케 한다. 

 

남암궁을 다 보고 나면 천주봉의 최정상인 태화궁(太和宮)까지 계속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금전은 천주봉 최정상의 석축(石築) 마당 정중앙에 있다. 중국 고대 건축의 최고 등급인 중첨무전(重檐廡殿, 사면(四面)은 경사가 져 있고, 하나의 정척(正脊)과 네 개의 사척(斜脊)이 있으며, 지붕의 면이 약간 누그러져 있는 건물의 형태), 구채 두공(九踩斗拱·지붕받침 네 개가 튀어나온 청나라식 두공), 황색(黃色)이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금전은 구리와 순도 높은 황금을 섞고 목조 형태를 본딴 건축물이다. 겹처마는 척추를 이루고 양 모서리는 날개를 이루며 전당의 등마루 장식에는 신선과 금수(禽獸)가 두루 포함되어 있어 보다 생생하고 동적인 감각을 자아낸다.

 

금전은 중국 선조들의 지혜가 모두 녹아 있는 결정체이다. 장인들은 목조 건축의 구조를 모방해 300톤의 정련 구리로 순묘(榫卯, 중국의 전통 짜맞춤 방식) 구조의 조립에 쓰일 3600개가 넘는 주물을 정교하게 주조한 뒤 산에 올라 이를 하나하나 끼워 맞췄다. 무당산 정상에는 이처럼 절묘한 솜씨로 구성된 구리 합금 전당이 우뚝 서 있다. 정밀하게 만들어진 주물은 빈틈없이 아귀가 잘 맞아 조립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이 때문에 전당 밖에서 산곡풍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전당 내부에서 타오르는 향촉의 불씨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

 

무당산은 중국 도교 문화의 집성체이자 중국 고대 장인들의 지혜가 녹아 든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유형과 무수한 재료로 이뤄진 고건축군은 설계, 구조, 장식, 배열에서부터 목조 구조의 사원, 구리로 주조된 전당, 석재 암묘(巖廟)와 구리, 목조, 석조, 진흙 등으로 만든 다양한 신상(神像)까지 고도의 기술적, 예술적 성과를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3. 옅은 운무 속 무당산의 풍경   사진/ 중국 공산당 스옌시위원회 무당산특구 공작위원회 선전부 제공


진무(眞武) 신앙과 무당산의 부흥

수·당 때 짓기 시작한 무당산 고건축군은 송·원 때 발전했고 명대에 이르러 크게 이름을 떨쳤다. 급기야 역대 황제들이 무당산을 황실의 가묘(家廟)로 삼고 건물을 축조해 나갔을 정도다. 사실 무당산이 명산으로 알려진 데는 도교의 흥성 외에도 한 가지 중요한 문화적 요소가 더 있다. 바로 ‘진무 숭배 사상’ 이다. 명나라 때 편찬된 <태악태화산지(太嶽太和山誌)>에는 무당산의 명칭에 대한 유래를 ‘진무가 아니면 역할을 맡기기 족하지 아니하다(非真武不足以當之, 오로지 현천(玄天·북쪽 하늘)의 천제(天帝)인 진무대제(眞武大帝)만이 산을 지킬 자격이 된다는 뜻)’로 설명하고 있다.

 

‘진무’란 중국 고대 신화의 사신(四神) 가운데 북쪽을 지키는 신인 ‘현무(玄武)’를 말한다. 도교가 성립된 이후 현무를 포함한 사신은 도교의 신선 계보에 편입됐고 조정에서도 북쪽 요(遼)나라 정벌에 대한 자신감 고양을 위해 북방의 수호신인 현무신에게 정신적으로 의지했다. 이에 따라 현무신은 삽시간에 대중의 숭배와 추앙을 받는 신령으로 등극했다. 송 진종(眞宗) 때는 성조(聖祖)로 추존된 조현랑(趙玄朗)의 현(玄)자를 피휘(避諱·휘로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음)하기 위해 황제의 명에 따라 ‘현무’라는 명칭을 ‘진무’로 바꾸기까지 했다. 처음 도교의 일개 호법신에서 시작한 현무는 송, 원, 명나라에 걸쳐 여러 황실의 지원 하에 점점 신격화되어 북방의 천계를 관장하는 대신(大神)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또한 명나라에 이르러서는 진무의 추존 현상이 절정에 이르렀다. 명 성조(成祖) 주체(朱棣)는 정난의 변(靖難之役)을 일으켜 자신의 조카인 건문제(建文帝) 주윤문(朱允炆)으로부터 황권을 빼앗았다. 그는 신권(神權)의 색채를 덧입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했기때문에 이 시기 진무에 대한 숭배 행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행했다. 명 성조가 베이징 황궁의 대대적인 보수를 계기로 무당산에서도 크게 토목공사를 벌인 결과 명 영락(永樂) 연간에는 3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무당산 토목공사에 투입되어 12년 간 9궁(宮), 8관(觀, 도교 사원), 36암당(庵堂), 72암묘(巖廟), 39교(橋), 12정(亭) 등의 건축군을 조성했다. 명 가정(嘉靖) 연간에 이르러서는 다시 한번 증축과 확장에 들어갔다. 모든 건축군의 설계와 배치는 진무가 신선이 되기 위해 도를 닦는다는 ‘진무수선(眞武修仙)’ 고사에 따라 통일된 기준에 따랐으며, 황실의 엄격한 건축 규정에 의거해 최종적으로 140리가 연이어진 건축군을 완성함으로써 중국 고대 건축사에 다시 없을 업적을 이룩했다.

 

신(新) 시대에 다시 태어난 무당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무당산 고건축군에 대한 보호 작업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이다.

 

1982년 중국 국무원은 무당산을 최초의 전국 주요 풍경명승구로 지정하고 1994년 금전, 자소궁, 남암궁, 옥허궁(玉虛宮) 유적 등을 최초의 전국 주요 문화재 보호 대상으로 선정하는 동시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 등재에도 성공했다.

 

1980년대부터는 무당산 문화재에 대한 보호를 강화해 역사를 존중하고 고건축의 옛 풍모를 되살린다는 취지로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고건축 복원 사업을 시행했다. 이 과정에서 기술자들은 선조들의 장인정신을 최대한 살렸다. 가령 우진궁(遇眞宮)의 궁벽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건축 원형에 따르기 위해 찹쌀에 석회와 모래를 섞어 ‘명나라식 시멘트’를 재현했다. 선도교(仙都橋)를 복원할 때는 다리 꼭대기에 유실된 원석(原石)을 채워넣기 위해 동일한 재질의 석재를 구해 채석장에서 기초 가공을 한 뒤 원석이 다리의 정확한 위치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 떨어질 때까지 현장에서 정밀하게 다듬었다. 원화관(元和觀)을 복원할 때는 대들보가 완전히 썩지 않은 상황에서 3곳에 균열이 발생하자 전문가들이 정밀한 측량을 통해 대들보를 들어내고 강판을 끼워 넣어 지붕의 전체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하중을 견디는 역할을 완벽히 대체했다. 무당산 고건축의 복원 과정에는 이처럼 많은 이들의 노력과 인내심, 지혜와 땀이 배어 있다.

 

무당산은 고대 유적지의 보호와 복원 작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통한 도교 문화 계승 작업에도 착수했다. 2021년 4월 20일 무당산 특구와 고궁박물관은 문화콘텐츠 협력 의향을 달성하고 고궁 문화콘텐츠 무당산 플래그숍(故宮文創武當山旗艦店) 개설과 각종 콘텐츠 상품의 디자인 및 문화 교류 활동을 공동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도교의 명산으로 알려진 무당산에는 지금도 향촉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다. 무당산은 기나긴 세월과 풍파를 겪은 사원, 깊고 다채로운 신화와 전설, 경건한 마음으로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가만히 후대에 전하고 있다.  

 

 

글|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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