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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향한 그리움 속에서 미래를 보다


2021-08-16      글|왕숴(王爍)

광둥성 광저우시 바이윈(白雲)구 룽강(龍崗)촌의 마을잔치 사진/ VCG

 

‘웨강아오(粵港澳, 광둥·홍콩·마카오)’ 지역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지리적·문화적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영남(嶺南)문화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의 풍부한 문화유산은 대대손손 계승되어 웨강아오 대만구(大灣區) 지역 문화의 번영과 발전을 촉진하였다.

 

하늘 아래 월극(粵劇)은 한가족

사람들이 작은 걸상을 하나씩 챙겨 들고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든다.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곧 무대에서 펼쳐질 공연에 대한 기대로 사람들의 눈이 반짝인다. 영남문화의 보물로 불리는 월극은 대만구 지역인들만의 특별한 어린시절 추억이다.

 

월극은 원래 광둥(廣東) 주장(珠江)삼각주에서 유행하던 공연이었다. 19세기 말 즈음 월극 배우들이 홍콩과 마카오 등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과거 월극은 주로 간이 천막무대에서 공연하였으며, 명절이나 경사에 빠질 수 없는 유흥이었다. 1920년, ‘성항대반(省港大班)’이라고 불리는 유랑극단이 출현하였고 그 중 규모가 큰 극단들은 광저우(廣州), 홍콩, 마카오 등지의 극장에서 활동하였다. 영화나 방송이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던 그 시절, 월극은 대만구 지역 사람들이 공유하는 오락이자 취미생활이었다.

 

 2009년, 광둥·홍콩·마카오 3개 지역의 공동 신청에 따라 월극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50여 년간 월극배우로서 활동해온 유명예술가 니후이잉(倪惠英)은 “하늘 아래 월극은 한가족과 다름없으며 서로를 구분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광저우시 융칭팡(永慶坊)의 고즈넉한 옛 거리에 위치한 월극예술박물관은 영남 원림(園林)의 특색을 십분 살린 건축물로 자연공간 속에 건물을 조화롭게 배치하여 수많은 월극 애호가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지난 4월 19일, ‘대만구, 큰 미래–웨강아오 대만구 월극예술 교류행사 및 제3회 세계 월곡(粵曲)소품 창작경진대회 개막식’이 월극예술박물관에서 열렸다. 전통 공연의상, 각종 인물 검보(臉譜, 중국 전통극에서 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나타내려고 배역의 얼굴에 각종 채색도안을 그린 것), 영남 특색이 농후한 창법과 동작 등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전통극에 속하는 광둥의 월극은 기타 지역 전통극의 창법을 융합해 표현했다면, 홍콩과 마카오의 월극은 전통의 정수를 바탕으로 현대적 요소를 녹여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행사에서는 미래 월극계를 이끌 차세대 배우들이 고전 월극에 창의적이고 트렌디한 요소를 적용하여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젊은 배우들의 참신한 공연을 통해 월극의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대만구 지역은 월극이라는 대표적인 문화요소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 필수품인 짙은 약재향을 머금은 량차(凉茶, 열을 식히기 위해 마시는 약재로 달인 음료), 중요한 행사 또는 명절에 빠질 수 없는 싱쓰(醒獅, 현지 전통 사자춤) 공연, 단오절마다 시끌벅적 진행되는 전통놀이 룽저우(龍舟, 용머리로 장식한 배)경기까지 많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같은 문화적 뿌리를 가진 이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함께 살아가고 함께 발전하는 중이다.

 

마카오 마거묘(媽閣廟), 신공극(神功劇, 중국 전통 축하공연의 일종) ‘마주딴(媽祖誕)’ 공연에 앞서 월극 배우 룽관톈(龍貫天)이 무대 뒤에서 준비 중이다. 


정통 광저우 서관대옥(西關大屋)은 영남문화의 기본정신

푸른 벽돌집, 석판길, 가마솥 손잡이 모양의 훠얼(鑊耳)벽, 조각장식으로 수놓은 처마 등 포산(佛山) 링난톈디(嶺南天地)의 내 굽이진 골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진다. 바우히니아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속 풍경을 걸으면 마치 영남지역을 그린 한 폭의 수묵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이다.

 

  포산조묘(祖廟) 맞은 편에 위치한 링난톈디의 옛 명칭은 둥화리(東華里)로 ‘포산 제1가’로 불린다. 이곳은 청왕조 영남거리의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젠씨(簡氏) 별장, 원후이리 가취옥(文會里嫁娶屋), 황원길 사당(元吉黃公祠), 이중승당(李衆勝堂) 옛터 등 보호문화재 22개, 역사건축물 128개, 역사거리 8개가 운집해있다.

 

중충(鍾崇) 포산시 자연자원국 찬청(禪城)지국 총계획사는 “개조 전에는 거리가 너무 낡아서 역사적 건축물들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고 회상했다.

 

2008년, 포산시는 옛 느낌을 그대로 살리는 고건축 수리방식을 이용해 둥화리 일대 개조에 착수했다. 문화재에 대한 신중한 복원 외에 전체 거리 개조 시에도 전통자재를 이용해 현지 건축 특징을 충분히 살리는데 집중했다. 예를 들면, 낡은 주택을 철거한 후 남은 벽돌과 기왓장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다.

 

개조 후 링난톈디로 탈바꿈한 이곳은 길의 너비, 건물 간격 등기본 배치는 물론이고 영남 특색 건축물, 그리고 거리 전체의 분위기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여러 인디브랜드와 창의공간이 들어선 옛 거리에는 젊음의 활력이 넘친다.

 

고건축물은 역사의 단편이자 도시의 기억이다. 각종 문화가 모두 어우러진 영남식 건축물은 가히 포용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영남식 벽양식인 ‘훠얼’은 관운(官運) 형통을 기원하며 관모를 본 따 만든 것이며, 지붕의 천정(天井)은 채광과 풍경 감상을 위한 것이다. 또한 지리적·기후적 특징으로 인해 실용성을 매우 중시하여 대부분의 공간이 가볍고 통풍이 잘 되는 구조에 차분한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조루(碉樓)와 기루(騎樓) 등 서양 건축양식이 결합된 건축물 또한 영남식 건축물의 대표라 할 수 있다.

 

대만구의 역사건축물은 영남의 문화를 계승할 뿐만 아니라 웨강아오 지역 주민들의 문화적 향수를 유지한다. 최근 몇 년간 웨강아오에서는 영남문화의 명맥을 잇기 위해 역사거리와 역사건축물의 보존 및 활성화를 적극 추진하는 중이다. 영남 고건축물 전문가인 탕궈화(湯國華) 광저우대학교 영남건축연구소 소장은 역사건축물의 보존 및 활성화 자체가 웨강아오 지역 도시들의 문화와 기억을 보호하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홍콩 완짜이(灣仔)에 위치한 블루하우스 건축군은 대표적인 영남식 건축물로 홍콩에 몇 남지 않은 발코니식 탕러우(唐樓, 2차대전 전에 건축된 옛 건물의 홍콩식 통칭)이다. 홍콩은 2006년부터 블루하우스 건축군에 대한 보수 및 활성화를 진행하여 2017년 홍콩 최초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문화유산보존상’의 최고 명예인 최우수상에 선정되었다.

 

탕궈화 소장은 “블루하우스 건축군은 1920~80년대까지의 탕러우 양식을 잘 보존하였다. 이는 광저우 언닝(恩寧)로 부근의 ‘죽통옥(竹筒屋, 죽통처럼 길게 늘어진 좁은 회랑을 가진 건물)’과 비슷한 양식으로 중·서양 요소가 결합된 영남건축물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과 서양문화가 혼재했던 당시 양상을 엿볼 수 있는 건물이다. 외벽, 목재계단, 발코니 철재 난간 등은 이미 완짜이 지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며 홍콩 및 마카오의 대표적인 역사건축물에는 영남문화의 기본 정신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마카오 또한 구시가지 보호에 힘쓰고 있다. 청 말기에 건축된 정가대옥(鄭家大屋)과 노가대옥(盧家大屋)은 ‘마카오 역사구역’의 일부분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또한 영남건축양식으로 가장 온전한 영남 서관대옥의 모습을 가진 건축물로 손꼽힌다. 탕궈화 소장은 “이처럼 온전한 형태를 가진 서관대옥과 영남식 원림은 광저우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오늘날 가장 정통 양식의 서관대옥을 보려면 마카오에 가야한다”고 전했다.

 

장닝(江寧)시 카이핑츠칸(開平赤坎)고진  사진/ VCG


고향을 그리는 간절한 마음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대만구는 해양문명의 오랜 영향으로 남보다 먼저 시도하고 포용심이 강한 사람들을 길러냈다. 이 지역은 당·송 시절부터 대외무역의 중심지였으며, 폐관쇄국(閉關鎖國) 정책을 시행하던 청왕조 때에는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다. 근대에 들어서는 혁명의 발원지이자 신중국 개혁개방의 선구지였다.

 

장먼우이(江門五邑, 장먼지역 5개 고을이라는 뜻) 화교화인 박물관에 전시된 꼬깃꼬깃한 여권과 누렇게 바랜 수표들은 우이지역 선민들이 바다 건너 먼 타향에서 분투하던 고난의 시절과 항상 조국을 마음에 품고 간절히 그리던 그 마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광둥 포산 사자춤 공연   사진/ VCG


19세기 중엽, 장먼우이 지역의 선인들은 생계를 위해 바다를 넘어 타향으로 건너가 열심히 삶을 개척했다. 그리고 머나먼 이국에서 자리 잡은 후에는 아낌없이 조국과 고향 개발에 투자했다.

 

장먼우이 지역에 지어진 1800여 채의 조루가 바로 그 증거이다. 이곳의 조루는 서양식 발코니, 아치, 회랑, 삼각형 지붕 등 요소와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이슬람 등 여러 건축양식을 영남의 전통양식과 결합하여 지은 건물이다. 장먼의 남서부 구역은 조루 밀집지역으로 각 마을마다 적어도 2~3채, 많게는 10여 채의 조루를 가지고 있다. 이 조루들은 장먼의 정치·경제·문화 발전의 상징으로 해외에서의 삶을 개척하고 조국을 지켰던 수많은 화교들의 지난 역사가 담긴 살아있는 근대건축사 박물관이다. 2007년, ‘카이핑(開平) 조루와 촌락’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늘날 장먼은 ‘중국 제일의 화교 고향’으로 불리운다. 장먼 출신 해외화교 및 홍콩·마카오·대만 동포 400여 만명이 세계 107개 국가 및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홍콩인 중 본적이 장먼인 사람의 수는 20% 이상으로 홍콩인 5명마다 1명이 장먼인인 셈이다. 마카오에서는 마카오인 3명마다 1명은 본적이 장먼이라는 말이 있다.

 

리우진(劉進) 우이(五邑)대학교 광둥교향(僑鄕) 문화연구원 원장은 근대 이후 장먼우이 지역인들은 홍콩과 마카오를 통해 해외로 나가거나 그곳에 남아 생계를 개척했다고 설명했다. 중·서양의 특징이 결합된 장먼의 역사건축물들은 홍콩·마카오 동포의 피와 땀이 서린 건물이며, 홍콩·마카오의 번영과 발전 또한 장먼우이 지역인들의 공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오늘날 웨강아오 대만구 개발이 심화됨에 따라 점차 더 많은 사람들이 대만구 지역에 모여들고 있다. 이곳의 남먼저 시도하고 진취심이 강한 인문정신은 대만구에 새롭고 다채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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