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회에는 세계 각지에서 온 37명의 작가들이 참가했다. 사진은 전시회 현장 모습 사진/진르미술관 제공
전시회의 주제가 ‘봉합’이라는 말을 들으면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떠오를 것이다. 어째서 봉합인지? 무엇을 봉합하는지? 누가 봉합하는지? 왜 봉합을 해야 하는지? 봉합을 하고 나면 무엇이 남는지?
하지만 베이징(北京) 진르미술관(今日美術館)으로 들어서는 순간,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2019년 12월 12일, 베이징 진르미술관에서 ‘제4회 진르문헌전(今日文獻展)’이 개막했다. 황두(黃篤)와 조나단 해리스(Jonathan Harris)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회는 ‘봉합(A stitch in Time)’을 주제로 초청 국내외작가 37명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전시 주제는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등 복잡 다변화하는 국제적 현실과 최신 이슈에 따라 정해진다. 현재 세계가 맞이하고 있는 불확실성과 새로운 변화로는 국제 경제 불균형, 보호무역 장벽과 반(反) 세계화의 대두, 집을 잃고 떠도는 이민자들, 편협한 포퓰리즘과 종교적 극단주의, 끊이지 않는 폭력적 테러리즘, 기술 경쟁과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인터넷의 등장과 공격, 환경 문제, 브렉시트 등 인류의 생존과 진보에 직간접적으로 위협이 되거나 영향을 주는 일들이 있다.
진르문헌전은 진르미술관이 주최하는 대규모 상설 트리엔날레(3년마다 한 차례씩 열리는 국제적 미술행사)로서 창설 이래 중국의 입장에서 중국 현대미술의 실험성과 학술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국제적인 시각에서 변화하는 세계 현대미술의 동향을 짚어내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2007년 제1회를 시작으로 12년의 세월 동안 중국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중국 예술의 이론과 응용 사례 파악하고 아시아와 세계 현대 예술의 최신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2019년 12월 12일, 제4회 진르문헌전이 진르미술관에서 개막했다. 사진은 개막식 현장 모습 사진/진르미술관 제공
현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봉합’의 힘
이번 진르문헌전의 주제는 ‘봉합(A Stitch in Time)’이다. 영어 관용구 A Stitch in Time’은 속담 ‘A Stitch in Time Saves Nine’에서 유래됐다. 즉,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즉각 문제점을 개선하면 더 큰 위험을 막고 수고를 덜 수 있다는 뜻이다. 현대예술의 발전 흐름에 대한 사전 대응을 강조한 말이다. ‘봉합’이라는 말은 재봉틀이나 외과수술에서의 ‘꿰매다’라는 사전적인 의미 외에도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아르헨티나계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가 1970~1980년대에 사회적·언어의 의미적 차원에서 주장한 ‘접합 이론(theory of articulation)’과 관련이 있다. ‘접합’이란 독립된 일이나 사물을 서로 연결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각각의 언어, 관념, 이데올로기, 경험, 가치, 욕망과 사람 간의 연계이다. 여기에 더해 전시회의 주제인 ‘봉합’은 인간의 주도적인 참여와 변화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된다. 행동으로 옮기고, 개입하고, 간섭하고, 밝히고, 변화시켜야 할 대상을 은유나 환기 등의 방식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리징후(李景湖), 현재 고고학(둥관, 東莞), 2016 사진/차오멍웨
37명의 작가들은 전시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했다. 1990년대 이후 진행된 글로벌화가 세계 경제, 정치, 문화에 미친 영향과 이로 인해 새로이 등장한 문제점을 조명한 작품에는 육체와 정신(body-mind), 국가와 지역(nation-region), 정체성과 기원(identity-origin), 의미와 지칭(meaning-reference), 이상과 실체(ideal-materiality), 로컬과 글로벌(local-global) 간 상호 연관성 또는 대립의 개념과 의미를 비롯해 오늘날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이들 간 상호 의존과 뒤섞임을 어떻게 바라보고 정의내려야 할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겼다. 또한 ‘혼종(Hybridity)’, ‘혼돈(Chaos)’, ‘초월경험(Trans-experience)’, ‘변천(Ascending)’이라는 네 가지 개념의 각도에서 주제를 한층 심화했다. 그물처럼 얽힌 세계 문화예술의 풍경 속에 내재된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고 재연했으며, ‘지구(地區), 지역(地域), 지연(地緣)’과 ‘타자, 정체성, 주체’ 간의 관계를 제시했다. 오늘날 현실 세계는 순시성(瞬時性)과 우연성, 차이점으로 가득하다. 인류사회에는 메워지지 않는 균열과 사회적 우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봉합’이나 ‘접합’에도 비로소 일정 수준 개입이나 간섭의 여지가 생겨난다.
최현주 작가 사진/차오멍웨
이매리 작가 사진/차오멍웨
황정후 작가 사진/차오멍웨
제4회 진르문헌전은 ‘봉합’의 관점에서 변화와 역동성과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계를 직시하고, 고립되고 끊어지고 파편화되고 모순된 현 세계는 접합을 통해 다시 연결짓거나 재구성하여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 이제까지 진르문헌전이 현대 예술이 새롭게 창조하는 의의에 중점을 뒀다면, 이번 제4회 진르문헌전은 전시를 통한 문제점 제기 방식을 통해 세계화로 인해 벌어진 간극을 메우고 뒤섞이는 요소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이에 관해 이번 전시회를 기획한 황두 씨는 이렇게 말했다. “진르문헌전은 정치적 전시나 정치가의 연설이 아니라 시각적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지고 생각하게 하는 전시회입니다. 저희는 ‘봉합’과 관련해 전시회라는 형식을 빌려 이슈나 난관이나 도전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고, 시각적 예술로 현재의 상태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깊은 사색을 통해 사람들에게 이런 난관이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영감을 주고자 했습니다.”
Larissa Sansour, 스테이트 타워-올리브 나무, 2012 사진/진르미술관 제공
‘봉합’에 대한 한국 작가의 해석
이번 전시회에는 총 16명(팀)의 다국적 예술가들이 초청됐다. 이 중에서 최현주, 황정후, 이매리 등 한국 작가 세 명의 출품작이 크게 눈길을 끌었다. 모두 첫 중국 전시회 참여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유달리 느낌이 다르다.
최현주 작가는 이번 전시의 기획자 조나단 해리슨의 초청을 받아 5점의 작품을 들고 중국을 찾았다. 그가 2014년 창작한 ‘Episteme Sabotage’ 시리즈 작품의 연장선이다. 그는 작품에서 위대한 서양 예술가들과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을 골라 비판적이고 지성을 담아 예술적으로 ‘매만졌다’.
그의 작품은 원작에 대한 경의의 표현이자 또 다른 의미에서는 원작을 뒤집어 존재와 인식의 불합리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에게 모나리자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하지만 아시아 사람들한테 왜 그것이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는지 물어보면 그 역사 과정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요. 아무 생각 없이 저걸 명작이라며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그래서 제 작품에는 동서양 인식의 차이, 인식의 문제를 바로잡고자 하는 주제가 담겼죠.”
황정후 작가 역시 이번에 자신의 대표작인 ‘가면’을 주제로 한 5점의 작품을 들고 왔다. “이번 작품은 ‘가면 시리즈’입니다. 화면상으로 보면 제 얼굴에 닭 껍질이나 생선 껍질을 가면처럼 쓰고 있는 모습이에요. 우리가 사람과 사람을 대면할 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인간관계에 대한 물음, 사람들이 느끼는 존재의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이매리 작가는 영상작품 한 점을 들고 왔다. 작품의 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이주’이다. 영상 전반부는 작가 자신의 존재의 기원을 상징하는 13~14세기 고려왕조 왕릉 유적이 개발로 인해 폐허가 되고 인근 주민들이 이주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후반부에는 서울이나 뉴욕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자신의 이주 역사를 ‘시적인’ 느낌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모든 인류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뉴욕이든 서울이든 이주해 온 각 나라 사람들이 개인과 민족의 이주 역사를 시로 이야기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세 작가는 이번 전시회 주제에 대해 모두 저마다의 시각을 갖고 있다. 최현주 작가는 ‘봉합’이 하나의 문화적 융합이자 서로의 문화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우리의 문화를 가지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국가 간 경계가 무너지면서 문화가 섞이기 시작했어요. 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거부하기도 하고, 오류가 있기도 하고, 비하하고 낮게 생각하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역사도 거의 100년이 넘었어요. 이제는 모두가 국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만큼, 동서양의 문화를 서로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고 고리를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황정후 작가는 ‘봉합’이 현실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나 문제를 ‘치료’하는 행위라고 본다. “봉합은 수술할 때 등 의학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는데요, 결국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죠. 세계적으로 많은 상처를 만들고 있는 문제들을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함께 이야기하고 치료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이번 전시회 주제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