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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 첸가오차오의 계혈석 조각예술


2019-09-24      

중국 공예미술대가,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 전승인, 항저우 G20 정상회의 국빈 선물 제작자 첸가오차오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창화(昌化)현에서 나는 도장석(圖章石)은 붉은 것이 주사(朱砂) 같고 청자색이 거북 같으며 감상할 만하고 최근에 와서는 얻기 드물다.’ 이는 청 건륭(乾隆) 연간의 <절강통지(浙江通志)>에 수록된 계혈석(鷄血石)에 관한 기록이다. 창화 계혈석은 7500만년 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것으로 저장(浙江)성 린안(臨安)시 창화진에서 서쪽으로 50km 위치한 위옌(玉岩)산에서 생산된다. 색이 주사처럼 아름답고 닭 피처럼 붉어 계혈석이라고 부른다. 첸가오차오(錢高潮)는 중국의 공예미술 대가이자 국가급 비물질문화유산(무형문화재) 중 ‘계혈석 조각’의 대표적인 전승자이다. 첸가오차오는 계혈석 생산지인 창화진에서 태어나 이런 돌들과 인연이 깊다. 계혈석은 첸가오차오의 손에서 중화 전통문화와 기술을 담은 예술의 보배가 됐다. 그는 수공예를 계승해 원석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대자연의 선물에 책임을 다했다. 이는 첸가오차오의 가장 소박한 기대다.

2016년 항저우 G20 정상회의에 참가한 각국 지도자를 위해 첸가오차오가 제작한 각 지도자 초상으로 된 도장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마음으로 기석을 조각하다
‘돌의 황후’라고 불리는 계혈석은 수산석, 파림석, 청전석과 함께 중국의 4대 국석(國石)이라고 부른다.1956년 첸가오차오는 저장성 린안시 창화진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계혈석의 생산지로 첸가오차오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세대가 계혈석을 채집해 생활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어릴 적 첸가오차오는 그림에 흥미가 많았고 4-5세 때부터 여기저기 그림을 그렸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선생님께 남은 분필을 받아 낡은 집 벽이나 나무판에 그림을 그렸다. 빈 곳에 온통 그림을 그려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았지만 첸가오차오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조각 예술의 길을 걷게 한 바탕이 됐다.

1970년대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창화 계혈석 도장 세트를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선물해 일약 수집가들의 수집 대상이 됐다. 그러나 당시 계혈석의 생산지인 린안 창화는 기술력이 높은 조각가가 드물어 생산한 광석을 가공하지 못해 1근에 1마오(毛, 1/10 위안)라는 저렴한 가격에 팔 수밖에 없었다. 주민들은 이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첸가오차오는 공사에 선발돼 저장성 원저우(溫州)에서 돌 조각 예술을 배우게 됐다. 첸가오차오는 조각을 배우던 시절을 자주 떠올린다. 그때는 조각 도구가 조악하고 원시적이어서 흙벽돌도 손으로 만들고 투조의 구멍도 모두 수작업으로 진행했다. 한 번 일을 시작하면 손에 계속 힘을 주고 몇 시간을 해야 했다. 이렇게 매일 고생스럽게 기술을 배웠다. 단조롭고 고된 학교 생활 4년에 대해 그는 “돌 조각에 대한 애정이 없었으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지금은 고단했던 그 시기에 감사한다. 그런 인내의 시간이 없었으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 년 뒤, 선발된 10명 중에서 첸가오차오 한 명만 공부를 다 마치고 돌아와 계혈석 조각을 계속했다. 왜 계속했냐는 물음에 첸가오차오는 “나는 고생을 참을 줄 알고 외로움을 견딜 줄 알았다. 그리고 타고난 재능도 조금 있었던 것 같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첸가오차오는 원하는 대로 계혈석 조각가가 됐다. “고향의 계혈석을 조각해 공예품으로 만들어 보다 많은 사람이 계혈석을 이해하도록 하는 게 내 사명인 것 같다.”

이후 첸가오차오는 계혈석 조각 예술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2005년 첸가오차오의 작품 <군선취회(群仙聚會)>가 제6회 중국 공예미술대가 작품 정품(精品) 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작품의 위쪽은 ‘서왕모 반도연’을 표현했고 아래쪽은 ‘8선(八仙)’을 표현했다. 주로 누조(镂雕)를 사용했지만 부조, 누공조, 천부조를 가미해 인물, 산수, 신선의 학, 정자와 누대, 누각, 작은 다리 등을 모두 담아 배치가 정교하고 복잡하면서도 세밀해 진짜처럼 보인다.

40년 동안의 노력 끝에 첸가오차오의 조각 기술은 입소문이 났고 옥 조각 중 ‘계혈’ 조각이라는 독자적인 유파를 형성했다. 그의 작품은 아름답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다채롭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한 명의 장인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화문화의 매력을 계혈석에 담고 싶었다.

그는 전통을 뛰어넘어 화조주수(花鳥走獸)와 관음불상 조각만이 아니라 중국 역사 문화를 자신의 조각 작품에 융합시켰다. <전왕공적도(錢王功績圖)>에서는 린안에서 태어난 오월국 왕 전류(錢鏐)의 애민정신과 방파제를 쌓고 조국의 평화 통일을 위해 송과 합병을 하고 금의환향한 장면을 표현했다. <대한웅풍(大漢雄風)>은 역사적 소재인 <한무대제(漢武大帝)>를 바탕으로 계혈석을 이용해 한무제 류철(劉徹), 사마천(司馬遷), 사마상여(司馬相如), 위청(衛青), 곽거병(霍去病), 장건(張骞) 등 걸출한 인물을 표현했다.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중국의 유명한 역사 소설 ‘삼국지’ 중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에서 결의하는 장면을 계혈석에 절묘하게 재현했다. “돌이 빛나게 하고 말하게 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란 첸가오차오는 계혈석과 깊은 인연이 있다. 그는 계혈석은 대자연이 린안에 준 보물이고, 모든 돌은 심혈을 기울여 조각하고 자기 손으로 그것에 생명을 부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기동래(紫氣東來)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국빈용 선물로 이름을 알리다
2016년 9월 G20 항저우(杭州) 정상회의가 저장성 항저우에서 개최됐다. 각국 지도자에게 증정할 선물을 제작하는 것은 어렵지만 영광스러운 창작 작업이었다. 2015년 11월 G20 정상회의 지도위원회는 조건에 부합하는 인사에게 정상회의 선물 기념품 모집 서한을 보냈다. 제1회 중국 옥 조각 대가인 첸가오차오는 초청 서한을 받고 흥분했다. “수공업자로서 이것은 꿈 같은 일이다.”
정상회의 주제와 맞물리고 ‘창의, 혁신, 독특, 명품’을 만든다는 디자인 철학을 구현하면서 중국 문화와 스타일을 나타내고 저장성의 정취와 항저우의 특색을 보여주기 위해 반복적으로 비교하고 고려한 끝에 중국 4대 명석(名石) 중 하나인 창화석으로 각국 정객의 초상을 새긴 첸가오차오의 도장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국빈 선물 디자인 방안 경선 과정은 매우 치열했다. 6개월 동안 디자인, 수정, 조정과 전문가들의 여러 차례에 걸친 선발을 거쳐 1600여 작품 가운데 100명을 선정하고 다시 20명을 추렸다. 결국 첸가오차오가 선정됐고, 첸가오차오는 이것을 ‘평생의 영예’라고 생각한다.

선발된 이후 장장 10개월 동안 고된 제작 과정이 이어졌다. 작업하면서 첸가오차오는 6kg이 빠졌다. 돌 하나를 잡으면 몇 시간 앉아있는 게 다반사였고 작업실에 한 번 들어가면 한나절 이상 나오지 않았다.
국빈 선물 제작 과정은 보안이 엄격해 첸가오차오는 동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디자인 제작 과정을 온전히 혼자 해야 했다. 각국 정객들의 이미지 특징과 풍채 등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첸가오차오는 관련 서적과 전기를 읽고 영상 자료와 뉴스들을 수없이 봤다.

그가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도장 손잡이 디자인이었다. 첸가오차오는 아름다우면서도 중화 전통문화의 깊이를 드러내기 위해 고민했다. 여러 디자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다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잠에서 깼다. 그러나 이 사자는 평화롭고 온화하며 문명적인 사자다’라는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 첸가오차오는 도장 손잡이에 사자를 조각하기로 결정했다. 사자는 국제적인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사자는 서방에서도 동물의 왕이고 중국에서도 상서로움의 상징이다. “우리는 ‘강대하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문화 신호를 보내길 바랐다.” 사자 조각 과정도 도전이 가득했다. 사자 형태에 독창성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첸가오차오는 자료를 많이 찾아보고 다양한 형태의 사자를 디자인해 최종적으로 사자와 각국 원수의 개성을 접목했다. 첸가오차오의 작업실을 방문하면 중국의 각종 돌사자 사진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의 영감도 바로 여기서 나왔다.

화해(和諧)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기술을 전승하고 장인정신을 전한다
“장인정신은 천천히 달여야 완성되는 약이다. 날마다 반복되는 작업은 지루하지만 편안하다. 시간의 연마는 느리지만 날마다 반 걸음씩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한 가지 일을 선택해 평생해 온 첸가오차오는 인생에는 여러 가지 선택이 있지만 하나를 선택했으면 전심전력을 다해 잘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첸가오차오는 ‘중국 공예미술 대가’ ‘국가급 비물질 전승자’ 등 여러 가지 영예로운 호칭이 있다. 첸가오차오는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장인정신’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성실해야만 최고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첸가오차오는 시대는 변하고 있지만 극치, 집중, 고수, 전승의 장인정신은 변치 않는다고 말했다. 극치를 추구하는 것은 일종의 태도이자 경지로 장인정신의 바탕을 이룬다. 전통적인 계혈석 조각 예술은 장인의 손에서 손으로 이어졌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끊이지 않았다.

석조 예술에 대한 경외심을 가진 첸가오차오는 모든 작품을 만들기 전 깊이 생각하고 공을 들인다. 이것이 바로 첸가오차오가 생각하는 완벽을 추구하는 장인정신이다. 그는 “계혈석 조각 기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외로움을 참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첸가오차오는 창작은 물론 이 기술의 계승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40여 년의 조각 인생에서 그는 100명이 넘는 제자를 양성했다. 그들 가운데 제일 특별한 사람은 그의 아들이자 저장성 공예미술대가 첸유제(錢友傑)다.

 만세사표(萬世師表)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이제 첸가오차오의 석조 기술은 후계자가 있다. 1986년 태어난 첸유제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조각 기술을 보면서 컸고 이 직업의 고생스러움을 잘 알고 있다. “계혈석은 대자연이 우리에게 준 보물로, 친구를 대하듯 책임을 다하는 것이 내가 어릴 때 이해한 장인정신이다.” 첸가오차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자란 첸유제는 어릴 때부터 조각 예술에 대해 경외심을 품게 됐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첸유제는 석조를 무척 사랑했다. “대학 때 평면 디자인을 전공했고 졸업한 다음에 석조 기술을 선택했다. 컴퓨터를 상대하는 것보다 돌을 연구하는 게 더 재미있다.”

“아버지는 나를 깨우쳐주신 선생님이다. 조각 예술을 가르쳐주실 때 아버지는 평소의 아버지와 달리 매우 엄격하셨다. 인물 조각을 배울 때 눈 하나를 조각하는데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고서야 아버지는 조금 만족하셨다.” 배우는 과정을 말하자 첸유제는 ‘고생담’을 쏟아냈다.

단하선연(丹霞禅緣) 사진/첸가오차오 본인 제공

현재 첸유제는 가장 젊은 저장성 공예미술 대가 중 한 명이다. 아들의 빠른 성장을 본 첸가오차오는 기쁨과 안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술을 계승하고 원석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며 대자연의 선물에 책임지는 것이 첸가오차오의 가장 소박한 바람이다.첸유제는 아버지의 조각칼을 물려받았다. 그는 아버지의 장인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자기 대(代)에서 계혈석 예술을 더 발전시키고 대중에게 다가가며 해외로 진출하길 바란다.

40여 년 동안 끝없이 연마한 끝에 첸가오차오만의 독특한 계혈석 예술 세계가 구축됐다. ‘아름답고 정교하며 우아하고 다채로운’ 계혈석 조각 예술은 세계에 중국 비물질문화유산의 시공을 뛰어넘는 매력을 보여주어 사람들이 다시 한번 중국 석조 예술의 매력을 알게 만들었다. 


글|장쉐(張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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