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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저우, 중한 우의를 담은 아름다운 도시


2019-08-20      

2019년 4월 2일, 광시 류저우시 룽안현 쓰딩(泗頂)진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 VCG

중국 광시(廣西) 하면 제일 먼저 구이린(桂林)을 떠올린다. ‘구이린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구이린 옆에 매력적인 아름다운 도시가 있으니 바로 류저우(柳州)다.

광시 좡(壯)족자치구 북쪽에 위치한 류저우는 대대로 ‘용성(龍城)’이라고 불렸다. 류저우는 인문 역사 경관과 여행 자원이 풍부한 중국의 A급 여행 도시이자 역사 문화 도시다. 이곳에는 중한 양국 인민이 함께 만든 혁명 우의가 있고, 신시대 양국 도시 교류를 직접 경험했다.

둥족대가(侗族大歌)   사진/ Krause, Johansen

수려한 산수와 민족정취가 어우러진 곳
류저우는 석산이 독특하고 수려하며, 암석 동굴이 특이하고 아름다우며, 샘물이 깊고 푸르며, 강물이 굽이지고 맑다. 류저우의 풍경에 매료된 역사적인 문인이 한둘이 아니다. 명나라 때의 여행가 서하객(徐霞客)은 <월서유일기(粵西遊日記)>에서 류저우 일대를 ‘흙산 사이로 돌이 보이고, 흙산이 굽이굽이 이어지며, 석봉 수십 개가 우뚝 선 모습이 양숴(陽朔), 구이린과 다르다’고 했다. 서하객과 동시대의 명사인 왕계원(王啓元)은 ‘류저우산천갑천하(柳州山川甲天下)’라고 했다.

류저우를 여행할 계획이라면 다룽탄(大龍潭)풍경지구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시 중심에서 멀지 않고 경관이 독특하다. 카르스트 지형과 중국 남방 소수민족의 문화 풍경, 아열대 식물 경관이 어우러져 ‘1호, 2담, 4곡지, 24봉(一湖, 二潭, 四谷地, 二十四峰)’ 풍경을 이루고 있다.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룽탄이 구불구불 이어지면서 도시를 가르고, 산과 물이 어우러져 ‘쌍담연우(雙潭煙雨)’ 등 경관을 이룬다.

‘기이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고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놓은 것 같이’ 생긴 지리적 특징 때문에 류저우는 ‘석도(石都)’라는 이름이 있다. 아열대 기후에 카르스트 지형인 이 도시는 독특한 자연환경 덕분에 산이 많고 물이 맑다. 기석 자원이 매우 풍부하고 계절별로 다양한 모습과 색을 보여주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류저우의 독특한 경관으로 자리 잡은 ‘기석’은 류저우 여행 브랜드 중 하나가 됐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류저우 남동부에 있는 더우러옌(都樂岩)풍경지구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이곳은 산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고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으며 카르스트 동굴이 매우 독특하다. 동굴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종유석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뽐내 ‘대자연의 변화무쌍한 예술’이 있는 궁이라고도 불린다. 중국 최초로 돌을 조각해 세운 현대 서예 비석림도 이곳에 있다.

류저우 지역은 민족 색채가 짙다. 근처에 좡족, 둥(侗)족, 먀오(苗)족, 야오(瑤)족 등 소수민족 거주지가 있다. 그들은 각자의 언어와 복식, 건축, 음식문화를 갖고 있다. 좡족의 노래, 야오족의 무용, 먀오족의 명절, 둥족의 건축은 소수민족의 다양한 문화와 생활양식을 보여준다.

‘가향(歌鄉)’이라고도 불리는 류저우는 전설 속 노래의 신선 류싼제(劉三姐)의 고향이다. 류저우 사람들은 지금도 산가(山歌)를 부르는 풍습이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사람들은 전설에서 류싼제가 신선이 됐다는 위펑(魚峰)산 아래, 장빈(江濱)공원에서 산가를 부른다. 산 아래에 산가가 울려 퍼지면 중국 근대시대의 문호 궈무뤄(郭沫若)의 ‘위펑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니 류싼제가 다시 왔나 보다’라는 시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둥족 지역의 신기하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과 그들의 다채로운 전통 명절을 체험하고 싶다면 류저우에서 북쪽으로 20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싼장둥샹(三江侗鄉)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민족적 색채가 진한 건축물에는 민간 전통문화와 신비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유명한 건축물인 청양펑위차오(程陽風雨橋)도 그중 하나다. 다리와 누각, 정자로 구성된 청양펑위차오는 둥족 마을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이 감탄을 자아낸다.

류저우의 전통 음식도 여행객에게 큰 기쁨을 선사한다. 아침에는 반드시 미펀(米粉, 쌀국수)을 먹어야 한다. 이곳의 크고 작은 골목에는 유명한 미펀집이 많다. 작다고 얕보면 안 된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미펀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둥족, 야오족, 먀오족, 좡족, 무라오(仫佬)족 거주지역을 방문하면 유차(油茶)를 맛볼 수 있다. 이들 소수 민족에게는 손님이 오면 유차를 대접하는 풍습이 있다. 기름지지만 느끼하지 않고 순수하고 향기로운 유차를 마시면 위가 보호되고 몸이 따뜻해지며 몸 안의 습기가 제거된다.

류저우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 기념관 외경   사진/ 한국독립기념관 제공

중한 인민의 우의를 기념하는 혁명성지
류저우는 여행의 도시일 뿐 아니라 중한 인민의 혁명 우의를 기념하는 성지이기도 하다. 항일전쟁 기간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곳에 머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上海)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전의 길에 올랐다.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전장(鎮江), 창사(長沙) 등지를 거쳐 1938년 광저우(廣州)에 도착했다. 같은 해 10월 김구, 조성환 등은 충칭(重慶)에서 장제스(蔣介石)와 임시정부 이전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장제스와의 협상이 결과를 얻기도 전에 광저우가 적에게 함락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가족 100여 명은 광저우에서 급하게 철수했다. 이후 포산(佛山), 싼수이(三水), 우저우(梧州), 구이핑(桂平), 스룽(石龍) 등지를 거쳐 1938년 10월 말 류저우에 도착했다. 다른 도시로 이동할 교통수단을 찾지 못해 류저우에서 잠시 머물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과 가족은 류저우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가 1939년 4월 22일 쓰촨(四川)성 치장(綦江)으로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임시정부 구성원들은 류저우 러췬서(樂群社)와 랴오레이(廖磊)공관에서 머물면서 사무를 봤다. 그들은 가족과 떨어져 랴오레이공관, 러췬서, 타이핑시(太平西)가 18호 등에서 머물렀고 룽청(龍城)중학교, 류허우(柳侯)공원 등지에서 활동했다.

류스(柳石)로 1호에 위치한 러췬서는 1927년 벽돌 목제 구조로 건설된 로마식 건물이다. 1934-1944년 정부 경영으로 바뀐 러췬서는 정부 측 인사와 해외 방문객을 접대하는 기관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류저우에 도착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했다.

류저우 룽청소학교도 임시정부의 활동 기억을 갖고 있다. 1939년 3월 1일 오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성원과 가족, 류저우 지역 각계 대표 등 200여 명이 류저우 룽청중학교 강당에서 한국 ‘3·1운동’ 2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임시정부는 또한 <한국 독립선언 2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는 한국의 ‘3·1운동’ 반일 독립운동과 20년 한국 독립운동 상황을 간략하게 소개했고 ‘중한 양국의 민족이 공동전선에 서서 적의 세력을 양국에서 철저하게 몰아내자’고 호소했다.

류저우 활동 기간 동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를 결성했다. 현존 자료에 따르면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939년 2월 25일 자 <류저우일보(柳州日報)>에 보도된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 부상장병 위문 자금 모금>이라는 글이다. 독립운동가인 정정화 여사의 구술을 정리해 출판한 자서전 <장강일기(長江日記)>에 ‘1939년 2월 한국광복군의 전신인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류저우에서 설립했다. 공작대 대장은 임시정부 군무부장 노백린 장군의 아들 노태준이 맡았다’라고 기록돼 있다. 공작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년과 류저우 청년 약 70명으로 구성됐다.

공작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류저우 사회 각계의 항전 단체는 긴밀하게 연결됐으며 다양한 항일 독립 활동을 진행했다. 한국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중국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열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기록에 따르면 1939년 3월 4일 저녁과 5일 오후 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813가영단(八一三歌詠團)’과 ‘남백극단(藍白劇團)’ 등 항일 단체와 함께 취위안(曲園)대극장에서 두 차례 공연하고 항전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위문하기 위한 자금을 모금했다. 공연이 끝나자 광복진선 청년공작대는 수입의 1/4을 <상병지우(傷兵之友)>사의 비용으로 류장(柳江)현 당무지도위원회에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류저우 부상 병사를 위한 위로금으로 전달했다. 1939년 4월 4일 광복진선 청년공작대가 류저우에서 철수하기 전 중국 전우와 함께 류허우공원 음악정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류저우에서 활동한 역사를 세심하게 발굴하고 보호했다. 이 역사를 기념하고 중한 양국 인민이 일본 침략에 공동 저항한 전쟁에서 맺은 깊은 우의를 재현하기 위해 2002년 9월 28일 류저우시 정부, 문화국, 문물판공실은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러췬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일투쟁 활동기념관’을 만들고 풍부한 사진과 문자 자료를 통해 임시정부가 중국 류저우에서 진행한 고난의 항일운동과 망명 생활을 전시했다. 현재 이 벽돌 목제 구조로 된 2층 건물에 한국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15년 5월 6일, 광시 류저우시 싼장현, 청양펑위차오 사진/ VCG

바둑을 통한 중한 도시 협력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류저우시는 한국의 지방 도시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류저우와 전라남도 광주의 바둑 교류는 중한 지방정부 간 교류와 협력의 모범이 됐다.

2011년 12월 8일, 류저우시는 광주시와 <우호도시 건설 의향서>를 체결했다. 2012년 한국기원의 양재호 9단이 이창호 9단과 함께 ‘2012 중국 류저우배 세계바둑대회’에 참가했다. 양재호 9단은 이때 처음으로 류저우를 방문했다. 그전까지 양 9단은 류저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류저우 공자 사당에 들어선 그는 대회장의 문화적 분위기에 매료돼 이런 곳을 이제야 방문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류저우에는 바둑 애호가가 많다. 양 9단은 특히 청소년 애호가가 많은 것을 기뻐했다. “류저우와 광주는 비슷한 점이 많아 자동차공업, 교육, 문화, 여행, 환경 보호, 경제 무역 등 분야에서 다양한 협력과 교류를 진행할 수 있다. 특히 자동차산업은 광주와 류저우의 주도산업이다. 두 도시는 위도가 비슷하고 시차도 2시간이 채 나지 않는 가까운 도시다.”

2013년 정월 대보름에 양 9단은 다시 류저우를 방문했다. 같은 해 7월 그의 소개로 한국기원이 ‘류저우 바둑문화 대표단’ 일행 18명을 한국 광주로 초청해 바둑 교류를 진행했다. 7월 25일 광주시 바둑협회는 류저우시 바둑문화대표단과 ‘바둑 우호교류 도시 협의’를 맺었다. 이후 두 도시는 바둑 대가의 상호 방문을 통해 바둑 기술을 연구했고, 바둑 전문학교 공동 설립을 논의하고 협력했다.

뤄밍(羅銘) 류저우시 정협 부주석, 시 바둑협회 주석은 “류저우와 광주는 ‘기로(棋路)’라는 길을 함께 걸었다. 앞으로 문화, 교육, 경제 등 다방면에서 더 깊이 있는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글| 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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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한 인문교류를 활성화한 성대한 축제

오랜 역사를 함께 한 이웃인 중국과 한국처럼, 광둥(廣東)성과 한국 역시 경제·무역·인문 등의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지속하며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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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교류사를 통해 본 중·한 협력의 미래

2월 2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정치학회, 성균관대학교 성균중국연구소 등의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상하이(上海)를 방문해 상하이 황푸(黃浦)구 마당(馬當)로 306룽(弄) 4호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유적지를 참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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