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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사, 중한 우의를 계승한 ‘역사의 도시’


인민화보

2019-07-19      인민화보

2018년 4월 20일, 창사시. 샹장 풍경지대 사진/VCG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전(移轉) 노선에서 창사(長沙)는 중요한 지점이다. 이곳에 축적된 역사와 혁명 우의 때문에 한국인 관광객이 대거 방문해 중국의 이미지를 대외에 알리는 중요한 창구 중 하나가 됐다.

창사는 후난(湖南)성의 성도(省都)이자 중국 국무원이 발표한 역사 문화의 도시, 1차 대외 개방의 여행 도시다. 창사는 산과 물이 아름답고 기후가 좋다. ‘단풍이 음력 2월의 꽃보다 붉다’는 웨루(嶽麓)산, 물과 모래톱이 어우러져 ‘봄이 오면 강물이 남색으로 물든다’는 샹장(湘j江)이 있다. 창사는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했고 역사 또한 유구하다. 국내외에서 유명한 마왕퇴(馬王堆)의 한묘(漢墓), 천년 학부 악록서원(嶽麓書院), 삼국 동오(東吳)의 죽간이 있다. 이곳은 살아있는 역사의 도시이자 두 팔을 벌려 손님을 환영하는 도시다.

항공에서 촬영한 악록서원 사진/VCG

살아있는 역사의 도시
창사하면 우선 웨루산 풍경명승지구를 방문해야 한다. 샹장 근처에 위치한 웨루산은 강을 기대면서 도시를 향하고 있다. 산, 강, 주(洲)가 하나가 돼 지리적 환경이 뛰어나다. 봄이 되면 온 산이 푸르고 진달래가 만발한다. 여름이면 울창한 숲이 시원하고, 가을이면 단풍이 온 천지를 물들인다. 겨울에는 나무에 눈이 얼어 은빛 세상이 펼쳐진다.

그러나 웨루산의 절경보다 창사의 역사가 더욱 매력적이다. 이곳에는 진나라 때의 나한송, 당나라 때의 은행나무, 송나라 때의 장목, 명청 때의 단풍과 밤나무 등 천년 고목이 세월의 무게를 견디며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있다. 천년 학교 악록서원은 송나라 4대 서원 중 으뜸이다. ‘한·위 최초의 명승지, 후샹(湖湘) 제일의 도량’이라는 고녹산사(古麓山寺)는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도가(道家) 20개 동(澗)의 보금자리인 운록도궁(雲麓道宮)이 이 산 정상에 지어져 있다. 천지의 정기가 서려 인문이 한데 모인 명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름에 창사를 방문한다면 웨루산에서 피서를 하는 것도 좋다. 가을이 되면 갈 곳이 더 많다. 창사는 가을 기후가 매우 좋다. 봄보다 조금 따뜻해 창사의 민간에서는 ‘10월 소양춘(小陽春)’이라는 말이 있다. 가을에는 쥐쯔저우(橘子洲)를 방문해보는 게 좋다.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친위안춘·창사(沁園春·長沙)>에서 ‘늦가을 홀로 외로이 서 있고, 샹장 북쪽엔 쥐쯔저우가 있다. 온 산이 붉게 물들고 첩첩 숲도 온통 붉네’에서 묘사한 것도 바로 가을 쥐쯔저우 풍경이다. 쥐쯔저우에는 마오 주석의 석상이 우뚝 서 있다. 영웅스럽고 멋있으며 청춘의 패기가 넘친다. 밤이 되면 이곳에는 레이저쇼와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오색찬란한 불빛이 쥐쯔저우를 보다 아름답게 수놓고 하늘의 불꽃과 도시의 불빛이 한번에 샹장에 비추어 활기차고 아름답다.

화명루(花明樓)도 창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다. ‘루’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창사시 닝샹(寧鄉)현 남동의 아름다운 작은 도시다. 경내에 푸르른 솽스(雙獅)령이 겹겹이 펼쳐져 있고 맑은 샘이 흐른다. 산골짜기 관개지역의 수로와 진장(靳江)이 교차해 지나가며 낮은 소리로 노래해 은빛 사슬이 그 사이에 박혀있는 것 같다. 청나라 동치 연간의 <영향현지(寧鄉縣志)>에 따르면 ‘옛날 제공(齊公)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루’를 짓고 두 아들을 공부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아들을 공부시키던 누각의 이름을 ‘화명루’라고 지었다. 현재 ‘화명루’ 세 자는 아름다운 이름이 됐다. 이곳에는 훌륭한 시가 많이 남아있다. 당나라 초기 시인 왕유는 시에서 ‘유암백화명, 춘심오봉성(柳暗百花明, 春深五鳳城)’이라고 읊었다. 송나라 시인 육유의 ‘산중수복의무로, 유암화명우일촌(山重水複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은 더 유명하다. 대대로 화명루 사람은 ‘루방(樓房)’에서 진지하고 창의적인 문장을 썼다.

창사를 방문하면 맛있는 음식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중국 8대 요리 중 하나인 샹차이(湘菜)의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미식의 도시다. 창사 사람은 음식을 좋아하고 잘 먹을 줄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음식을 좋아하고 발견할 줄 아는 눈과 튼튼한 위장만 있으면 모두 미식이다. 샹차이는 기름지고 맛이 진하다. 특히 시고, 맵고, 향기롭고, 신선하고, 훈제가 많다. 창사의 맛있는 간식을 맛보고 싶다면 훠궁뎬(火宮殿)을 방문하는 것도 좋다. 유자 처우더우푸(油炸臭豆腐), 자오옌 싼쯔(椒鹽馓子), 쯔메이 퇀쯔(姊妹團子), 바이리완(白粒丸) 등 간식거리가 많다. 이 밖에 창사는 규모가 크고 입소문이 좋은 대규모 식당과 푸드존이 많다. 여행으로 지친 저녁 식당에서 맛있게 먹으면 음식의 맛이 하루의 피로를 씻어줄 것이다.

2006년 3월 31일, 한국독립운동 지도자 김구 전시관이 창사에서 개관했다. 중한 양국의 우호 인사가 김구 선생 조각상을 감상하고 있다. 사진/VCG

중한 혁명우의를 담은 성지
창사가 위치한 후난은 신중국 창조자인 마오쩌둥의 고향이고 중국 혁명의 발원지 중 하나로 중한 양국 인민이 함께 항전한 기억이 남아있다.1919년 조선반도(한반도)에서 일본 식민 통치에 반대하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후난 사람들은 다양한 형식으로 지지와 원조를 보냈다. 1921년 3월 14일 한국인 이희춘, 이약송의 초청으로 차이허썬(蔡和森), 치우아오(仇鳌), 이지페이(易基培) 등 28명의 창사 각계 대표가 중한 호조사(互助社)에 가담했다. 중국공산당의 초기 활동가인 마오쩌둥, 허수헝(何叔衡), 허민판(賀民範)은 각각 통신부, 선전부, 경제부 주임이 됐고 주소는 선산학사(船山學社)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의거 이후 상하이(上海) 지역에서 활약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저장(浙江)성 항저우(杭州), 자싱(嘉興) 일대로 이전했다. 1937년 이후 일본군이 상하이, 난징(南京)을 침략하면서 당시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기관의 인력과 가족 100여 명이 다시 짐을 싸 1937년 11월 창사에 도착했다.

김구는 임시정부가 창사로 이전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일 전쟁이 강남까지 퍼지고 우리의 광복 전선 3당(한국 국민당,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사람들과 그 가족 100여 명이 물가가 저렴한 창사로 피난가기로 결정했다. 특히 창사는 물자가 풍부하고 물가가 저렴했다. 장즈중(張治中) 장군도 잘 알았기 때문에 우리의 편의를 많이 봐주었다. 우리는 상하이, 항저우, 난징에 있을 때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늘 가명을 사용했지만 창사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김구라는 이름을 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투쟁은 중국 각계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38년 1월 11일 중국공산당이 창간한 <신화일보(新華日報)>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한국 독립 활동 소식을 대량 보도해 도의와 여론적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1938년 2월 5일 <신화일보>는 익명을 요구한 문화계 인사와 김구와의 담화 기록 전문을 게재했다. 제목은 <조선 국민당 지도자 김구의 담화(朝鮮國民黨領袖金九的談話)>였다. 여기에는 ‘중한 양국의 형제는 항일전쟁의 횃불 아래서 손에 손을 잡고 민족 해방을 쟁취하자’ 등 내용이 포함됐다.

창사에서 김구는 여러 방면의 지지를 받았지만 위험한 상황도 맞았다. 1938년 5월 7일 조선 혁명당, 한국 독립당, 한국 국민당 지도자가 창사의 난무팅(楠木廳)에서 회의를 진행하면서 3당 합당을 위한 구체적인 문제를 의논했다. 그러나 조선 혁명당 당원 이운한이 갑자기 회의장에 난입해 참석자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사건 발생 후 중국 국민정부는 즉시 그를 체포했고 김구를 샹야(湘雅)병원으로 이송해 치료를 받도록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제스(蔣介石)는 하루에 세 차례 전화를 걸어 김구의 치료 상황을 물었다. 당시 후난성 정부 주석이었던 장즈중은 직접 병원을 찾아 위문했고, 김구가 완치돼 퇴원한 후 김구를 안전하고 공기 좋은 웨루산의 장후이짠(張輝瓒) 무덤 옆 집으로 옮겨 요양 치료하도록 했다.

현재 웨루산 장후이짠(張輝瓒) 무덤 옆 집에는 ‘김구 선생 요양지 유적’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400여 ㎡ 규모의 요양지는 전형적인 30년대 건축이다. 왼쪽으로 들어가면 주택이고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서재와 주방, 창고가 있는 구조다. 거실 정중앙에는 김구 동상이 놓여있고 동상 위 편액에는 ‘독립정신’ 4개 글자가 써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창사에서 8개월 머물렀다. 일본 전투기가 창사를 공중 폭격하자 다시 이전했다. 하지만 난무팅 6호, 장후이짠 묘 옆집은 현재 한국 관광객이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관광지가 됐다. 이 두 곳은 중한 양국 인민이 단결해 외세에 저항하고 민족 독립을 쟁취하려는 역사가 기록돼 있다. 동시에 중한 양국 인민의 전통적인 우의의 증인이다.

창사-구미, 교류의 새 장을 쓰다
창사는 중한 양국의 혁명 우의를 담은 기념지이며 신시기 중한 우호 교류의 연결고리다. 창사와 한국 구미시와의 교류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1992년 중한 수교 이후 창사는 한국 각지와 경제 무역 관계를 계속 강화했다. 한국 전자산업기지인 구미시도 중국 각지와 접촉을 시작했다. 1994년 한국 LG그룹은 창사의 770공장과 합자해 LG 수광(曙光)전자그룹공사에 6억 달러를 투자했다. 당시 한국의 중국 투자 사업 중 최대였다. 바로 이 경제 협력으로 창사와 구미는 상호 이해가 깊어졌고 왕래는 더 빈번해졌다.

1998년 10월 두 시는 우호도시 협의를 체결하고 이미 존재했던 경제·무역 관계에 더 유리한 조건을 마련했다. 이후 구미시의 기업들은 여러 차례 단체를 조직해 경제·무역 교류를 진행했다. 전자 정보, 자동차 부품 등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연결해 상호 이익과 공동 번영을 실현했다.

21년 동안 창사와 구미시는 빈번하게 왕래해 우호의 기반이 견실해졌고 실무 협력도 활발해졌다. 잠정 통계에 따르면, 1998년 두 도시가 결연을 맺은 이후 창사와 구미시는 교류단 60여 팀, 연인원 2000여 명을 서로 파견했다. 경제, 무역, 문화, 교육 등 분야에서 일련의 우호 활동을 진행했다.

창사 시민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창사와 구미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문화 교류 공연이다. 2004년부터 창사시 예술단과 구미문화원은 격년으로 상호 방문해 두 도시 시민에게 서로의 전통 문화를 소개했다. 2018년까지 ‘아리랑’이 5차례 창사시 시민에게 공연됐고 ‘류하이칸차오(劉海砍樵)’ 스토리가 4차례 구미에서 공연됐다. 현재 창사의 ‘소두견(小杜鵑)예술단’은 구미시에서 제법 유명하다. 구미문화원은 창사에 올 때마다 팬들의 큰 박수를 받고 있다.

창사와 구미의 교류는 성과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18년 10월 18일 제20회 중일한 우호도시 교류대회에서 창사시와 일본 가고시마시, 한국 구미시는 중일한 우수 우호도시 협력상을 수상했다. 현재 두 도시는 협력 발전, 중한 우의 계승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있다.


글| 장진원(張勁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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