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사회·문화 >> 본문

시짱 민주개혁 60년, 변화와 행복시짱 민주개혁 60년, 변화와 행복


인민화보

2019-06-27      인민화보

시짱 민주개혁 60주년 경축대회가 3월 28일 오전 10시 라싸시 포탈라궁 광장에서 성대한 막을 올렸다. 사진/차오전치

1959년 3월 28일 시짱(西藏)은 정교일치의 봉건 농노제가 종식됐다. 이로써 민주개혁의 서막이 열렸고 민주개혁은 시짱을 현대 문명으로 이끄는 역사의 동력이 됐다. 그해, 74세의 미국 기자 안나 루이스 스트롱은 포탈라궁 꼭대기에 서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는 시짱의 농노가 해방되는 것을 제일 먼저 본 미국인이고, 포탈라궁에서 해방된 라싸(拉薩)를 본 최초의 미국인”이라고 말했다.

스트롱은 기사에서 “그들은 기쁨에 넘쳤다. 그들은 이제 ‘씨 뿌리는 자가 거둔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수확의 대부분을 지주에게 바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얼마 뒤 이것이 자기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수백 년 동안 자신을 옭아맨 족쇄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자유다, 평등하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라고 썼다.

올해는 시짱 민주개혁 60주년의 해다. 60년 동안 민주개혁은 시짱 사회에 천지개벽 같은 변화를 일으켰다. 동시에 전통 민족문화를 계승 및 함양하고 생태환경을 효과적으로 보호했다.

시짱 민주개혁 60주년 경축대회가 3월 28일 개막한 가운데, 시짱 각 민족 주민들은 국기를 들고 포탈라궁 광장에 모여 경축대회에 참가했다. 사진/차오전치

시짱 산난시 커쑹단지 민주개혁 이후, 해방된 수많은 농노들이 토지를 분배받았다.  사진/차오전치

‘차바’에서 ‘샤오캉’까지
점심때가 다가오자 햇빛에 반짝이는 궁부르(貢布日)산에 겨울에서 깨어난 에너지가 쌓였다. 시짱 산난(山南)시 커쑹(克松)단지의 한 시짱식 주택에서 우리는 72세의 쒀랑둬지(索朗多吉) 주위에 모여 앉아 향기로운 쑤유차(酥油茶)를 마시며 ‘60년 전 시짱 민주개혁’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부모님은 모두 농노였다. 나는 8살 때 농노가 되어 ‘차바(差巴, 소작농)’ 대열에 들어갔다. 우리는 지주의 토지에서 농사를 지어 지주에게 ‘차(差, 소작료)’를 상납했다. 하지만 이 ‘차’는 계속 완료되지 않았고, 평생을 해도 다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이런 생각을 한 사람은 쒀랑둬지 뿐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시짱 연구학자인 알렉산드라 다비드 넬은 자신의 저서 <오래된 시짱, 새로운 중국을 대면하다(古老的西藏面對新生的中國)>에서 ‘옛 시짱에서 농민은 평생 부채가 있는 농노이고, 게다가 그들에게는 온갖 세금과 무거운 부역이 있어서 자유를 상실했고 해마다 더 가난해진다’고 썼다.

“설산이 쑤유(酥油, 소와 양의 젖에서 얻어낸 유지방)가 된다고 해도 지주가 다 가져갈 거야. 강이 우유가 된다고 해도 우리는 한 모금도 못 마시지.” 농노들 사이에서 전해지는 가요 가사다.

지금의 짱족 커쑹단지는 시짱 민주개혁 이전까지 커쑹장원이라고 불렸고, 지주 쒀캉 왕칭거레이(索康·旺淸格勒)의 이 장원은 산난 6대 장원 중 하나였다. 농사 시작 시기와 추수 시기가 되면 농노들의 고생스러운 날이 시작된다는 것을 뜻했다. “해가 뜨면 일을 시작해 하루 종일 일했다. 일을 잘못하면 지주에게 혹독한 매질을 당했다.” 쒀랑둬지의 말이다.

시짱 취수이(曲水)현 라싸허(拉薩河) 강변에는 이중언어 유치원이 있다. 사진은 야외활동 시간이 되어 음악에 맞춰 무용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사진/ 판정(潘徵)

1959년 5월 커쑹은 시짱자치구 공작위원회의 지도로 처음으로 민주개혁을 시작했고 시짱 역사상 최초로 농촌 당지부를 설립해 시짱 민주개혁의 첫 번째 촌이 됐다. “민주개혁 이후 우리는 처음으로 자기 토지를 갖게 됐고, 배부르게 먹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 쒀랑둬지의 말이다.

현재 쒀랑둬지 가족은 300㎡ 규모의 시짱식 주택에 거주하면서 시짱식 가구합작사를 운영해 가족의 연 소득이 60만 위안(약 1억318만원)을 넘는다. “처음에는 나라에서 이자 보조 대출을 해주었다. 나는 이런 대출을 이용해 가구합작사를 차렸다.” 국가의 정책 지원과 사상 해방, 근면 성실이 더해져 커쑹단지에는 쒀랑둬지, 볜바(邊巴) 등 먼저 부를 쌓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은 자기 가족을 부유하게 하면서 동시에 마을 사람들에게 제조 가공, 공사 도급 등을 맡겨 그들의 소득도 올려주었다. 커쑹단지 전체가 산난시 샤오캉(小康)의 모범이 됐다.

신중국 성립 70주년, 시짱 민주개혁 60주년이 되는 동안 커쑹단지는 농노제 장원에서 전면적인 샤오캉으로 향하는 사회주의 신농촌이 됐다. 2017년 커쑹단지는 모든 빈곤 가구가 ‘빈곤’이라는 꼬리표를 뗐다. 2018년 커쑹단지의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은 1만9735.5위안으로 1978년보다 98.7배 성장했다. 이제 쒀랑둬지는 ‘끝나지 않은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우리는 혜택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말했다.
 
 시짱 바이랑(白朗)현 과일·채소 하우스산업의 빠른 성장은 현지의 빈곤주민들에게 소득 증대·농업기술 습득의 기회를 제공했다. 사진/차오전치

고원 위의 과일·채소 비닐하우스
짱족 여성인 판둬(潘多)는 요즘 매우 긴장된 날을 보내고 있다. 며칠 뒤면 그녀가 책임지고 있는 페피노 멜론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작물을 시장에 내놓고 ‘시장 검증’을 받기 때문이다. 판둬는 중농성역(中農聖域)농목과학기술유한공사의 바이랑(白朗) 현지 직원이다. 그녀가 책임지고 있는 페피노 멜론은 회사가 이번에 처음 시도한 작물이다. 판둬와 동료들은 자기 아이 대하듯 페피노 멜론을 키웠다.

‘전국의 채소는 서우광(壽光)에 있고, 시짱의 채소는 바이랑에 있다.’ 전통적인 농업 도시인 르카쩌(日喀則)시 바이랑현은 요 몇년 채소 비닐하우스 생산으로 유명해졌고 현지 짱족 농목민도 비닐하우스 재배로 부의 길에 올랐다.

1998년 바이랑현 정부와 산둥(山東)의 시짱 지원 간부가 촌민들에게 비닐하우스 채소 재배를 하도록 도왔다. 비닐하우스와 채소 모종, 기술을 무료로 지원했다. 20년 동안 바이랑의 채소 산업은 규모화, 산업화, 표준화를 거듭했다.

“바이랑현의 과일·채소 산업은 빈곤인구 4071명에게 1인당 평균 4500위안 이상 소득을 증대해주었다. 빈곤인구 2765명에게 나눠줄 이익 배당금 276만5000위안을 마련해주었다.” 쥐정장(鞠正江) 산둥성 제8차 시짱 지원 간부, 바이랑현위원회 상무위원, 부현장은 이렇게 말했다.

바이랑현은 시짱자치구 식량의 주산지이자 국가급 채소 표준화 재배 시범지구다. ‘시짱의 식량 창고’, ‘고원 과일과 채소의 고향’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다. 현재 바이랑현은 1만무(亩) 규모의 유기농 과일·채소 재배를 발전의 중심으로 삼아 2018년 고효율 온실 4200무를 신설했다. 쥐정장 부현장은 “올해 재배 면적 1만무 이상, 예상 생산량이 4억 위안에 달한다”고 전했다.

바이랑현 과일·채소 비닐하우스산업의 빠른 발전은 현 전체의 빈곤 탈출 공격전과 전면적인 샤오캉을 강력하게 뒷받침했다. 바이랑현 1만무 채소 생산기지 사업의 경우, 이 사업으로 전환되는 토지가 207무로, 1무당 2000위안으로 계산하면 해마다 농가에 41만4000위안이 57가구 300명에게 지급된다. 이 가운데 문서화·카드화한 빈곤 가구가 2가구 6명이다. 건설에 필요한 노동력이 연인원 2만6000명이고, 지급 급여가 520만 위안, 30명의 장기 취업을 해결했다. 이 가운데 빈곤 가구 문서화·카드화한 사람이 15명이고 1인당 연평균 5만4000위안의 소득이 증가했다.

바이랑 중농성역농업생태원의 길이 300m, 너비 20m 규모의 태양열 과일·채소 비닐하우스에는 오이, 딸기, 페피노 멜론 등 채소와 과일이 재배되고 있다. 현재 판둬는 매월 순 수입으로 5000위안의 월급을 받고 있다. 이곳에서 일하기 전 개인적으로 농사를 지었을 때는 연 소득이 1만 위안에 불과했다. 판둬는 “이곳에서 일하면 수입도 좋지만 현대적인 농업기술을 배우고 농사 철학이 바뀐 게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일은 판둬에게 월급 이상의 것을 주었다.

쥐정장 부현장은 “과거 우리는 농민의 소득을 높여주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기술 교육을 했다. 이렇게 하면 농민이 농업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농민 개개인은 시장과 리스크를 잘 이겨내지 못한다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규모 있는 기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기업이 현지 농민을 고용하도록 장려하고 지원하고 있다. 특히 빈곤 농민을 고용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이렇게 일하면서 배우면 농민은 월급도 받고 기술도 배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일하면서 배우는’ 방식은 빈곤 농민의 채소 재배 기술과 리스크 예방 기능을 높였고 스스로 부를 쌓는 능력을 강화해주었다. 쥐정장 부현장은 “앞으로 기업은 규모와 시장에 더 집중하고, 생산은 기술을 잘 아는 농민에게 맡길 수 있다. 이는 기업과 농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라싸 강가의 새 마을 
80허우(80後, 80년대 출생자)인 창주(強久)는 시짱인 특유의 부끄러움과 수줍음을 보였다. 그녀는 평생 야크나 방목하면서 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외부 세계를 갈망했다. 싼유촌으로 이사오기 전 창주 가족은 라싸 취수이(曲水)진 취푸(曲蒲)촌 산골짜기에서 살았다. 집안은 대대손손 목축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녀는 아버지와 번갈아 산에 올라 야크를 방목했다. 연말이 되면 야크 두 마리를 팔아 한 마리는 식량을 사고 한 마리는 돈으로 바꿨다. 절약해도 1년에 1만 위안 정도 벌었다.

“아프면 일단 말을 타고 방목하던 산에서 마을까지 10여 리를 가야 한다. 그다음 다시 마을에서 경운기를 타야 진에 있는 병원에 갈 수 있다.” 매우 불편한 교통은 창주에게 아주 힘든 기억 중 하나다.

2016년 6월 ‘문서화·카드화한 빈곤가구’인 창주 가족은 국가의 빈곤 가구 이전 정책에 힘입어 다른 183가구와 함께 라싸 강가의 싼유촌으로 이사했다. 취푸촌에서 싼유촌으로 이사한 것은 창주에게 ‘가장 행복한 일 중 하나’였다. 창주는 “국가의 좋은 정책에 감사한다. 새 집을 짓는데 돈 한 푼 안 들었고, 집안의 가구도 다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싼유촌으로 이사한 뒤 창주는 모바일 영업점을 운영해 마을 사람들의 휴대전화 카드, 통화비 충전, 인터넷 비용납부 등 업무를 해주면서 매달 5000여 위안을 번다. 그녀의 남편 라바둔주(拉巴頓珠)는 외지 운수업으로 1년에 6만 위안 정도 번다. 이사 전과 비교해 연간 가구 소득이 10배는 증가했다.
지금까지 창주는 시짱 밖 세상을 볼 기회가 없었다. “아이들이 텔레비전에서 톈안먼(天安門)과 냐오차오(鳥巢)를 보고 베이징에 가보고 싶다고 난리다.” 창주는 꿈이 하나 있다. 아이들이 조금 더 크고 형편이 더 나아지면 가족과 함께 외부 세계를 둘러보는 것이다.

칠순 노인의 소망
3월 28일, 시짱 민주개혁 60주년 대회가 라싸시 포탈라궁 광장에서 장중하게 거행됐다. 시짱자치구 각 민족과 각계각층 인사가 행사에 참석했다.
“오늘 나는 여러분 앞에서 인간을 말살한 옛 사회를 비난하며 60년 동안 고향에서 일어난 큰 변화를 말하고자 한다….” 라싸시 청관(城關)구 둬디(奪底)가도 웨이바(維巴)촌 사람인 71세의 뤄쌍핑춰(洛桑平措)는 대회에서 해방된 농노를 대표해 이같이 말했다.

60년, 한 갑자 동안 시짱은 크게 바뀌었다. 통계에 따르면, 시짱자치구의 총생산은 1959년 1억7400만 위안에서 지난해 1477억6000만 위안으로 연평균 9.5% 성장했다. 2018년 도농 주민 1인당 평균 가처분소득은 각각 3만3797위안과 1만1450위안이었다. 시짱은 전국 최초로 15년 무상교육을 시행해 청장년 문맹률이 0.52%로 떨어졌다. 의료보험도 시 전체를 커버해 1인당 평균 기대수명이 35.5세에서 68.2세로 늘어났다.

우잉제(吳英傑) 시짱자치구 당위원회 서기는 경축식에서 “민주개혁운동은 시짱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고 가장 깊이있고 가장 위대한 사회변혁으로, 시짱 사회 발전과 인권 진보에 획기적이고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며, 인류 문명 발전사와 세계 인권사상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대한 진보이고, 세계의 지붕에 녹슬지 않는 금자탑을 세운 것이며, 시짱 역사의 신기원을 열었고, 시짱 인민이 사회주의의 탄탄대로에서 활보하며 나아가는 새로운 노정을 열었다”고 강조했다.

“공산당을 따라 나는 농노에서 신분이 바뀌었다. 지금 가장 큰 소망은 당을 따라 샤오캉으로 향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터전을 건설하고 보다 아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다.” 뤄쌍핑춰의 말이다.


글|차오전치(喬振祺)

240

< >
1027 最新的背景 小_副本.jpg

중한 청년 교류, 우호의 미래를 열다

가을의 베이징(北京)은 하늘이 푸르고 공기가 맑아 일 년 중 가장 좋은 계절이다.

읽기 원문>>

중한 전통우의와 미래협력을 논하다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70주년을 맞이하여 중국인들에게 더욱 뜻 깊은 해이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