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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영과 장젠(張謇),국적을 뛰어넘은 두터운 우정


인민화보

2019-02-12      인민화보

 
김택영(金澤榮·1850-1927). 자(字)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이다.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23세 때 경기지역에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쌓았다. 1891년 불혹을 넘긴 나이에 진사(進士)가 된 뒤 1894년 편사국(編史局) 주사(主事)로 발탁되었다. 1895년에는 중추원 서기관 겸 내각기록국 사적과장에 임명됐으며, 이후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또한 대한제국 학부편집위원 등의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와 중국의 명사 장젠 간에 매우 두터운 우정이 있었다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 

장젠(1853-1926)은 중국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청(淸) 광서(光緖)연간의 장원(壯元)이자 중화민국 시기의 저명한 실업가인 그는 젊은 시절 오장경(吳長慶)이 이끄는 청군을 따라 조선의 임오군란 진압에 참여했다. 당시 30살이 되지 않았던 장젠은 오장경의 막료로서 조선의 많은 관료 및 문사들과 접촉했는데, 그 중 연배가 비슷했던 김택영과 남다른 우정을 쌓았다. 김택영의 문집에는 ‘(장젠이) 마침 난을 정리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 김운양(金雲養)으로 인해 그와 사귀게 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김택영이 조선의 문신이었던 운양 김윤식과의 관계를 통해 장젠을 알게 됐음을 알 수 있다. 김택영은 장젠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시를 헌정하며 그를 찬미했다.

“바다에 몰아치는 흑풍(黑風)의 소리는 천둥처럼 우렁차다. 태산은 잠기고 부상(扶桑·해뜨는 곳)마저 무너뜨리네……오(吳)공 수하에 많은 모사가 있다하지만 책략을 세울 때는 당신같은 인재가 필요하네.” 김택영은 장젠을 청군의 ‘장자방(張子房)’에 견줄 정도였다. 

1908년, 일본의 침략과 반일세력에 대한 탄압에 못 이겨 김택영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다. 이때 제일 먼저 떠올린 이는 바로 옛 친구 장젠이었다. 앞서 김택영은 장젠과 수시로 서신을 주고 받으며 연락을 이어오던 중이었다. 당시 장젠은 고향인 난퉁(南通)에 살며 실업(實業)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저장(浙江) 일대에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택영이 난퉁에서 장기간 머물게 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김택영은 자신의 시에서 “통주(通州)는 오늘 이후 나의 고향이니, 숭양(崧陽)과도 같고 한양(漢陽)과도 같네. 장(張)가 형제들은 나의 형제나 다름 없으니, 일평생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고 노래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통주’는 바로 ‘난퉁’을 말하며, 숭양은 곧 ‘개성’을 가리킨다. ‘개성’은 김택영이 태어난 곳, 한양은 김택영이 벼슬을 한 곳이다. 김택영은 난퉁을 숭양과 한양에 비유함으로써 난퉁에 대한 사랑과 애정, 특히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장젠 또한 김택영의 글을 높이 평가했다. 김택영이 그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장젠은 김택영을 난퉁 한묵림인서국(翰墨林印書局) 편집인으로 추천했다. 당초 난퉁의 청둥난잉(城東南營)에 살았던 김택영은 후에 쉬자샹(許家巷)으로 이사했고, 1915년에는 장젠이 매입한 시난잉(西南營) 29호를 고정 거처로 삼았다. 김택영은 난퉁에 많은 시문(詩文)을 남겼을 뿐 아니라 한국의 전통 예술문화를 소개하는 데도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김택영이 쓴 <안중근전>은 1만부 이상 발행되며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1926년 장젠이 세상을 떠나자 김택영은 큰 슬픔에 빠졌다. 이 시기 김택영은 “창려(昌黎)는 구름이 되고 맹교(孟郊)는 용이 되어, 문자로써 오래도록 교류했네. 당신이 떠난 뒤 모든 것이 부질 없어졌으니, 난퉁의 달 난퉁의 강바람을 이제 어찌하겠나”라는 시를 남겼다. 당시 김택영은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과 조국의 광복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절망에 빠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장젠의 죽음은 김택영에게 있어 마지막 버팀목이 사라진 것이었다. 장젠의 지원이 사라짐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김택영은 1927년, 78세라는 고령에 아편을 먹고 자살했다. 

혹 기회가 된다면 난퉁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난퉁시 중심에는 그가 살던 집이 ‘김택영 고택(故宅)’이란 이름으로 보존 중이다. 또한 난퉁 랑산(狼山)풍경구 내 ‘당초사걸(唐初四傑)’ 중 하나인 낙빈왕(駱賓王) 무덤에서 멀지않은 곳에 외로운 무덤 하나가 있는데, 바로 김택영이 영면에 든 곳이다. 묘비에는 ‘한(韓) 시인 김창강 선생의 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글|위셴룽(喻顯龍), 베이징대학교 국제관계학원 국제관계학 박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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