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치 :  >> 사회·문화 >> 본문

‘옌황예술관’, 세월로 다져진 中 최초의 사립미술관


인민화보

2019-01-30      인민화보

옌황예술관 외경 사진/옌황예술관 제공

베이징(北京) 야윈촌(亞運村) 근처에 비대칭으로 된 궁궐식 건물이 있다. 복두정(覆斗頂·사다리꼴의 천장) 형태의 자색 유리기와 천장, 청석판으로 된 벽,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원림 정원이 소박하면서 장중한 느낌을 준다. 이곳이 바로 중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인 옌황예술관(炎黃藝術館)이다.

이곳에서 기자는 추이샤오둥(崔曉東) 관장을 만났다. 그는 중국미술협회 회원이자 당대 중국 산수화의 대가다. 그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옌황예술관의 시작과 운영 과정을 들으면서 중국 사립 미술관의 발전사를 엿볼 수 있었다.

2016년 국가예술기금 협찬으로 옌황예술관은 중앙미술학원과 ‘실크로드·옌위(絲路·岩語 )-중국 암채회화 문헌전(中國岩彩繪畫文獻展)’을 개최했다. 사진/옌황예술관 제공

미술관 토대를 닦고 발전시킨 스승 황저우
“옌황예술관은 내 스승인 황저우(黃胄) 선생님이 설립했다. 선생님은 중국 현대 회화사에서 이름 높은 화가로 내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추이샤오둥은 이렇게 말했다.

황저우는 기억을 필묵 조형으로 빠르게 전환시키는 것에 능했다. 그의 작품에는 복잡하고 빠른 동작, 여러 구도, 여러 인물을 포착하고 조형하는 능력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전혀 새로운 인물화 필묵을 선보여 중국화의 예술 언어를 확대했다. 1978년 황저우의 <송응도(松鷹圖)>가 당시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티토에게 선물로 보내졌다. 같은 해 10월 그의 대작 <백려도(百驢圖)>가 일본 히로히토 일왕에게 선물로 증정됐다.

1984년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한 추이샤오둥은 황저우를 스승으로 모셨다. 추이샤오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황저우 선생님은 소장가였다. 평소에도 예술 작품 수집에 관심이 많았다. 50년대부터 예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때론 자기 그림과 다른 화가의 그림을 바꾸기도 했다. 개혁개방 초기 중국 예술품은 가격이 매우 저렴해 대가의 작품과 문물을 포함해 수많은 작품이 외국인에게 낮은 가격에 팔렸다. 황저우 선생님은 이런 현상을 매우 안타까워했고 민족예술 보호를 위해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985년 황저우는 영국 런던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회 기간 동안 영국 박물관을 참관한 그는 민간이 자금을 모으고 학술 연구와 소장, 전시가 하나가 된 박물관 아이디어를 얻었다. 1985년 이후 황저우는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현지 기업가들은 그의 작품에 큰 관심을 보였다. 특히 1986년 2월 황저우는 싱가포르국가박물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는데, 주최측이었던 싱가포르연합조보와 홍콩에 있던 황저우의 친구들은 베이징에 황저우를 위한 ‘황저우 예술전시관’을 설립하자고 의기투합했다. 마침 그 기간 싱가포르의 도시계획을 시찰하러 온 베이징 대표단이 황저우의 전시회를 참관했다. 황저우의 친구들이 자금을 모아 ‘황저우 예술전시관’을 설립하겠다는 말을 들은 대표단은 즉시 찬성했다. 추이샤오둥은 “황 선생님은 개인미술관 중국의 민족문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공익 성격이 강한 이 미술관은 이름도 고심해서 지었다. 황저우 선생님의 이름은 ‘옌, 황, 즈, 저우(炎黃之胄, 중화민족의 후예)’ 네 자에서 따왔다. 그래서 이 미술관 이름은 중국인을 대표하는 두 글자인 ‘옌황(炎黃)’으로 지었고 이것이 옌황예술관 이름의 유래”라고 말했다.

1987년 옌황예술관 건설 준비 작업이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추이샤오둥은 “그때는 심사 비준 절차가 매우 까다로웠고 준비작업이 매우 복잡했지만 각계의 협력을 통해 성공리에 추진됐다”고 말했다. 다행히 황저우의 미래지향적 행동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당시 베이징시 부시장이었던 허루리(何魯麗)는 “사립 미술관 경험이 전무해 참고할 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황저우 선생의 옌황예술관을 통해 사립 미술관이라는 새로운 길이 열리길 바랐다”고 말했다.

황저우의 헌신적인 노력과 사회 각계의 적극적인 성원에 힘입어 건축면적 1만여 ㎡에 달하는 옌황예술관이 1991년 9월 28일 개관했다.

(원나라 시대) 장순자(张舜咨), 설계회(雪界绘), <황응고회도(黄鹰古桧图)> 사진/옌황예술관 제공

험난한 민족예술 전시와 보호의 길
설립 초기, 황저우는 옌황예술관의 위상을 ‘민영과 국가 보조가 어우러진 문화예술공익사업기관’으로 잡았고 경비는 자체 조달하기로 했다. 당시 중국에는 미술관이 적었지만 옌황예술관은 민족예술 보호와 계승이라는 무대에서 적극 활약했다.

추이샤오둥은 1993년 옌황예술관이 개최한 <과학과 예술전(科學與藝術展覽)>이 기억에 남는다. 황저우는 저명한 물리학자이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리정다오(李政道)와 ‘93과학과 예술(93科學與藝術)’이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을 개최하기도 했다. 또한 <우창숴, 황빈훙, 치바이스, 판톈서우 4대 화가전(吳昌碩, 黃賓虹, 齊白石, 潘天壽四大家畫展)>, <근 100년 중국화전(近百年中國畫展)>, <동기창 서화전(董其昌書畫展)>, <황저우 예술대전(黃胄藝術大展)> 등은 당시 옌황예술관이 중요한 영향력을 가졌던 전시회였다.

황저우, 1976년 작 <일야상념모주석(日夜想念毛主席)> 사진/옌황예술관 제공

중국 예술품 소장에서도 옌황예술관은 훌륭한 성과를 거뒀다. 옌황예술관 설립 시 황저우는 소장하고 있던 대가들의 진귀한 작품 200여 점과 개인 작품 1000여 점을 기증했다. 황저우에게 감동받은 사람들도 소장품을 기증해 옌황예술관 발전을 지원했다. 추이샤오둥은 “전 중국 국무원 부총리 구무(谷牧) 선생은 오랫동안 소장한 <백매도(百梅圖)>를, 중국미술가협회 상무이사장 사오위(邵宇)> 선생은 <장동상학(藏童上學)>을, 장자오허(蔣兆和) 선생의 부인 샤오충(蕭瓊) 선생은 장 선생의 유작 <고난(苦難)>을, 장쉐량(張學良) 장군은 친필로 쓴 ‘옌황예술관’ 글씨를 기증했다. 현재 옌황예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은 3000여 점으로 황저우 선생님 시대에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97년 황저우가 세상을 떠났다. 아쉽게도 그는 사립 미술관 붐이 인 시대를 보지 못했다. 2002년 중국에 사립 미술관 설립이 본격화됐다. 베이징진르(北京今日)미술관, 시루이(犀銳)예술센터, 상하이둬룬(上海多倫)미술관, 상하이정다(上海證大)현대미술관, 난징쓰팡(南京四方)미술관 등이 속속 설립됐다. 2008년 상하이와이탄(上海外灘)미술관, 베이징쓰상(北京寺上)미술관, 민성(民生)현대미술관, 상하이이하오(上海壹號)미술관 등도 개관했다. 이 밖에 개인미술관도 발전했다.

초심을 잃지않는 새로운 시도
“미술관을 만들긴 쉬워도 키우긴 어렵다.” 추이샤오둥 관장은 사립 미술관 운영을 이렇게 말했다.
“황저우 선생님은 옌황예술관을 설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나아가 옌황예술관 운영에 더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그를 가장 괴롭혔던 문제가 바로 미술관 운영 자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황저우 선생님이 받은 찬조금은 전부 무상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 선생님은 자신의 그림으로 답례를 했다. 선생님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그림을 들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협찬을 요청했다.”

1998년 중국 정부는 <기금회 관리 임시방법>을 공포했다. 황저우의 부인 정원후이(鄭聞慧)는 가족의 적금과 원고료 등을 모두 모아 ‘황저우 미술기금회’를 설립·등록해 옌황예술관 운영에 쓰도록 했다. 당시 운영자금은 주로 황저우기금회가 소장한 그림에서 나왔다. 2004년 황저우기금회는 처음으로 경매회사와 협력해 11개 작품을 경매에 내놨다. 정원후이는 경매에 참가한 목적을 “황저우 미술기금회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금회 자금 모집 루트가 제한적이고 기금회 운영 자체도 돈이 들기 때문에 옌황예술관에 대한 지원이 쉽지 않았다.

이것은 옌황예술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립 미술관 설립 붐이 일고 얼마 뒤 다른 미술관들도 같은 어려움에 부딪혔고 일부는 운영난을 이유로 전환을 꾀하기도 했다. 2006년 매년 적자를 기록한 진르미술관이 영리 미술관으로 전환을 결정했고 스위스은행과 협력해 해마다 일정 금액을 지원받기로 했다.

금융기관과의 협력이 사립 미술관의 출구가 됐지만 옌황예술관은 ‘비영리’ 원칙을 고수했다. 2007년 12월 11일 중국 민생은행이 1억 위안이라는 거액을 10년 동안 장기 지원하기로 했다.

2012년 말, 중앙미술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추이샤오둥이 옌황예술관 관장이 됐다. 옌황예술관의 미래에 대해 추이샤오둥은 자신의 생각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공익 성격을 띤 기관으로 오랫동안 지속해야 한다.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초심을 잃지 않고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민족 예술을 계승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추이샤오둥은 초심을 잃지 않으면서 새로운 시도를 통해 옌황예술관의 발전을 꾀했다. “나는 민간 미술에 관심이 많다. 중앙미술학원에서 나는 리치(李琦) 선생님께 배웠다. 나중에 리치 선생님의 부인 펑전(馮真) 선생이 민간 미술품을 수집한다는 것을 알고 선생에게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펑전 선생은 소유하고 있던 소장품을 모두 우리에게 기증했다.” 최근 몇 년 옌황예술관은 일본, 영국, 포르투갈 등지에서 민간 미술전을 개최했다. 전원 분위가 물씬 풍기는 전시품들은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젊은 예술가들의 발굴과 소개도 추이샤오둥의 새로운 업무다. “중앙미술학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동안 젊은 세대 학생들에게 관심이 많이 갔다. 그림을 잘 그리고 전도유망한 젊은 예술가들에게 사회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추이샤오둥은 옌황예술관에서 근무한지 2년 째 되던 해 ‘여성의 날’에 중국화 화가 40여 명을 초청해 ‘일향영소(逸香盈素)-2013 청년여성예술가작품전(2013青年女性藝術家作品展)’을 개최했다. 그들은 대부분 ‘치링허우(70後·70년대 출생자)’와 ‘바링허우(80後·80년대 출생자)’로 전시 작품은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등 다양했고 스타일, 형식, 내용도 다채로웠다. “이 전시는 이미 브랜드가 됐다. 2013년부터 우리는 해마다 여성 예술가 한 명의 전시회를 열었고 올해 벌써 6회 째다. 나는 그들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며 그들의 성장을 돕고 싶다.” 



글| 장진원(張勁文)

240

< >
배너2.jpg

중·한 경제협력의 새로운 무대가 될 새만금

10월 16일 한국 새만금개발청이 주최한 ‘새만금 투자환경설명회’가 베이징(北京)에서 열렸다. 한국의 이철우 새만금개발청 청장, 배호열 투자전략국 국장, 중국측 푸룽청(傅龍成) 중국상업연합회 부회장 등 중·한 양국의 정부 공직자와 기업가 20여 명이 설명회에 참석했다.

읽기 원문>>

‘소통의 다리’를 놓고 ‘이해의 창’을 열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10월은 수확의 계절이다. 2018년 10월 11일, 한국을 대상으로 한 중국 유일의 국가급 잡지인 월간 <중국> 한글판이 서울에서 창간 10주년 기념식 및 한국 전문가 자문위원 위촉식을 가졌다.

읽기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