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할 정도로 길고 무더웠던 베이징(北京)의 여름이 끝나간다. 5월 중순부터 최고 기온이 35도를 웃돌며 수은주를 뜨겁게 달구더니 9월까지 폭염이 이어졌다. 특히 올해는 고온(高溫)에 다습(多濕)까지 더해져 유난히 더웠다는 게 베이징 토박이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필자가 기억하기에도 베이징에서 여름을 보내며 우산을 챙겨야 할 날이 이처럼 많았던 적은 없었던 듯 싶다. 더위에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선 식당에서 종업원이 무심하게 내주는 뜨거운 물 한 잔은 언제나 당혹감을 선사한다. 살얼음이 낀 냉수에 진짜 얼음까지 띄워 벌컥벌컥 들이켜도 모자랄 판에 뜨거운 물이라니. 한국인과 달리 중국인들은 여름이건 겨울이건 물을 따뜻하게 데워 마신다.
베이징 시내의 한 대학교에서 유학할 때 삼복더위에도 땀을 뻘뻘 흘려 가며 대형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잔뜩 받아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국 친구들을 보며 두 눈을 의심했던 경험이 있다. 공항이나 기차역 곳곳에 설치된 정수기에서 냉수를 받으려 파란색 버튼을 아무리 오래 누르고 있어도 미지근함 이상의 온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중국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상온의 맥주와 콜라도 한국인에게는 생소하다. 이와 관련된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십수 년 전 산둥(山東)성 태산(泰山)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조선 중기 문인 양사언의 시조 속 한 구절처럼 태산은 중국의 수많은 명산(名山) 중 한국인들이 가장 친숙함을 느끼는 산이다.
한여름에 찾은 태산에서 필자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좁은 계단 길을 가득 메운 인파도, 무거운 냉장고를 대나무 장대에 걸고 정상까지 오르는 깡마른 인부도 아니었다. 타는 듯한 목마름 속에 들이킨 미지근한 맥주. 산기슭의 수많은 식당 중 어느 한 곳에서도 냉장 상태의 맥주를 구할 수 없었다. 갈증을 참으며 타이안(泰安)역에 도착해서야 겨우 발견한 냉장고 속 찬 맥주는 가뭄 끝 단비와도 같았다.
몰슨 쿠어스(Molson Coors) 등 글로벌 맥주 회사들은 중국 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섭씨 5~7도 정도에서 최고의 맛을 내는 맥주를 별도로 제조하기도 한다. 차가운 맥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중국인들의 식습관을 고려한 경영 전략이다.
중국인의 차(茶)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차 문화는 4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음료수 대용으로 따뜻한 차를 마신다. 석회질 성분이 많은 물을 끓여 마시다보니 차 문화가 발달했다는 게 통설처럼 회자되는데, 수질이 좋은 곳에서도 차를 즐기는 것을 감안하면 문화적 전통이 더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가 만난 한 중의학자는 ‘머리는 차고, 가슴은 열려 있으며, 배는 따뜻한 것이’ 이상적인 신체 상태라고 설명했다. 따뜻한 차와 물을 마시는 게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이라는 것이다. 차가운 것은 몸에 좋지 않다는 게 중국인들의 일반적인 인식인 것 같다.
필자도 최근 원치 않게 중국식 양생법을 실천한 적이 있다. 지난달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의 한 초원으로 출장을 갔는데, 냉장 시설이 미비해 2박 3일 동안 시원한 생수를 구경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무더위에 미지근한 생수를 마시는 게 고역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적응이 돼 갔다. 특히 장시간 봉사활동으로 땀을 많이 흘린 뒤 상온의 생수를 마시자 차가운 물을 마셨을 때보다 갈증 해소가 빨랐다.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지식 검색을 하니 의학적으로도 일리가 있단다.
경험이 동반되지 않은 편견이나 선입견이 얼마나 공허한 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 차 한 잔은 약장수를 굶어 죽게 한다(淸晨一杯茶, 餓死賣藥家)’는 말처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중국식 양생은 수천 년에 걸친 경험의 축적이다.
다만 최근 들어 중국에서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전통차보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즐기는 중국 젊은이들이 늘고, 편의점 냉장고도 시원한 음료와 맥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외국인들을 위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먼 미래의 중국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미지근한 맥주를 마시며 살았다는 사실을 역사책을 통해서나 접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