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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항일화가’ 한러란, 혁명의 길 위에서 성장하다


인민화보

2018-10-12      인민화보



한러란(韓樂然, 1898-1947), 본명 광위(光宇), 지린(吉林)성 옌지(延吉)현(현재 룽징(龍井)시) 출신, 조선족 정치활동가, 예술가, 학자.‘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한러란의 작품에는 역사의식과 현실주의 정신이 강렬하게 표현돼 있고, 20세기 전반기 진보된 예술사조를 대표한다. 그는 투루판, 쿠처, 카스 등 유적 발굴에 참여해 신장 바이청 커쯔얼 석굴의 역사문화 자료를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연구·정리했다.

커쯔얼(키질) 118굴 불장악기도(佛奘樂伎圖) 모사도 1947년  사진/중국미술관 제공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마르시 앨보허는 자신의 저서인 <One Person/ multiple careers>에서 ‘슬래시(slash)’라는 단어를 이용해 ‘단일 직업’의 생활방식에 만족하지 않고 다양한 직업과 신분을 갖고 다원화한 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설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봤을 때 한러란은 전형적인 ‘슬래시’ 청년이 분명할 것이다. 

한러란은 1898년 지린성 옌지현 룽징촌의 조선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후 50년의 세월 동안 그는 예술가이자 공산당원, 학자였으며, 이 세 가지 신분은 그로 하여금 짧지만 기적적이었던 삶을 살게 했다.

광명을 향해 전진하는 티베트인(간난티베트족자치주(甘南新疆自治州)) 1945년  사진/중국미술관 제공

예술과 혁명의 조화 
한러란은 조선족 농민가정 출신이다. 나고 자란 곳이 중국과 구 소련, 조선(북한)과 인접한 국경지역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조선말과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다. 훗날에는 일어와 러시아어, 유럽 각국의 언어를 익혔다. 그림 그리기와 공부를 좋아했지만 고급소학교(신중국 건국 전의 소학교는 초급소학교와 고급소학교로 나뉘어졌다. 초급소학교는 지금의 1-4학년, 고급소학교는 5-6학년 과정이었다. 소학교 전 과정을 마치고 졸업시험에 합격하면 고급소학교 졸업장이 수여된다. 당시에는 고급소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많지 않았다)를 졸업 한 후 학업을 포기하고 전화국 교환원과 세관 직원으로 일했다. 세관에서 일하면서 외국 서적과 신문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 

1919년 3월, 한러란은 옌볜(延邊)에서 일어난 반일 민족독립대회 거리시위에 참여했다. 시위는 진압됐고, 한러란은 혁명의 진리를 깨우치고자 소련의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1920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상하이(上海)로 가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입학, 그곳에서 수채화와 유화를 공부했다. 재학기간 중에는 청년화회(靑年畵會)를 조직해 첫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3년 뒤,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한러란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입당 후 한러란은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동북(東北)지역으로 돌아가 당 조직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는 한러란이 동북 최초의 사립미술전문대학인 펑톈(奉天)미술전문학교를 설립하고 스스로 교장이 되어 미술교육 및 예술보급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때였다. 동북에 머무는 동안 한러란은 사진관 주인이자 미술교사 신분으로 위장하여 연락소를 꾸몄다. 그때 중국공산당 대표 6인을 소련까지 호송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러란은 인물화 화가임과 동시에 풍경화 화가였다. 그는 하늘이 빚은 대자연을 사랑했고 건축물에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앞서 헤이룽장(黑龍江)성 치치하얼(齊齊哈爾)에 머물던 때에는 룽사(龍沙)공원에 유럽식 정자 ‘격언정(格言亭)’을 설계해준 바 있었다. 1929년 건축된 격언정은 이후 훼손되었다가 2005년 옛 모습을 되찾았다. 

1925년부터 1929년까지 5년의 시간 동안 한러란은 중국과 조선반도(한반도)를 오갔다. 예술과 혁명은 그렇게 청년 한러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되었고, 나아가 일생의 길을 결정해준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되었다. 

라부렁사 앞에서 춤추다(拉卜楞寺前歌舞) 1945년  사진/중국미술관 제공

반파시즘 투사가 되다
1929년 가을, 한러란은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다. 1931년 루브르예술학교에 입학했고, 다시 네덜란드·벨기에·체코·폴란드·영국·이탈리아·소련·스페인 등지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 같은 신분으로 위장해 프랑스공산당의 반파시즘 투쟁조직과 스페인공화국의 혁명전쟁에 참여했다. 

중국미술관이 2018년 5월 23일부터 열고있는 <실크로드 무지개-한러란 탄생 120주년 작품전>에는 한러란이 1932년 창작한 유화 <파리 개선문 앞의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 속 한러란은 중절모를 쓰고 양복을 입은 채, 오른손으로는 붓과 조색판을 들고 왼손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역광으로 인해 얼굴은 어둡게 표현됐지만 이를 드러낸 채로 미소 짓고 있는 표정은 매우 생동감 넘친다. 또한 개선문 벽면에 조각된 프랑스아 뤼드의 작품 <의용병들의 출발(라마르세예즈)>을 배경으로 강력한 필법을 운용하여 태양 아래 찬란한 ‘군신(軍神)’을 그려냄으로써 반파시즘에 투신한 애국청년의 열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같은 해인 1932년, 한러란은 또 다른 유화 작품 <개선문 위의 부조>를 완성했다. <파리 개선문 앞의 자화상>의 배경이 된 조각물을 그린 것으로,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라마르세예즈>가 한러란의 ‘정신적 힘’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8년 동안 한러란은 정통 서양 유화를 접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며 식견도 넓혔다. 그렇게 그의 유화 및 수채화 기교는 향상되었고, 동시에 그는 국제 반파시즘 투사가 되었다. 1937년 10월, 한러란은 <파리만보> 기자 신분으로 시안(西安)사변의 주역 양후청(楊虎城)을 인터뷰하고 그의 항일활동을 알렸다. 그는 다른 청년들과 힘을 모아 양후청을 홍콩까지 보내기도 했다. 

한러란이 중국으로 돌아왔던 그 해는 일본의 중국 침략 전쟁이 본격화했을 때로, 한러란은 전쟁의 불길 속에서 동분서주해야 했다. 이 기간 그는 동북으로 가서 총회를 살리고, 기관 간행물인 <반공(反攻)>에 글을 싣고 표지를 만들라는 임무를 부여 받았다. 

앞서 그는 르이 엘리(중국에 거주 중이던 뉴질랜드 작가·교육자), 스매들리(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 특파원 겸 작가)와 항전 정보를 교류했다. 1938년 옌안(延安)을 방문했을 때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접견을 받았다. 그 당시 그가 그린 대형 유화 <전민항전(全民抗戰)>은 우한(武漢)시 황학루(黃鶴樓)에 걸려 있었다. 옌안 방문 이후 전쟁지역 당정위원회 소장(少將)지도원을 맡으라는 지시에 따라 국공 양군의 항일주둔지 진동남(晉東南)에서 항일 통일 전선연락업무를 책임졌다. 이 밖에도 기자 신분으로 황허(黃河) 이북 지역에서 민생 및 전쟁상황 등을 조사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한러란은 줄곧 전쟁의 최전방에서 활동했으며, 보도 및 그림, 촬영을 무기 삼아 인민해방군과 국민당군 장교 사이를 오가며 항일전선 연락에 최선을 다했다. 

1940년 4월, 한러란은 바오지(寶鶏) 기차역에서 국민당 헌병에게 체포되어 3년 간 수감되었다가 당 조직의 구명운동으로1943년 초 가석방되었다. 

집주인 부부의 초상화(房東夫婦肖像) 1946년  사진/중국미술관 제공

서북지역에서 꽃핀 작품활동 
수감 생활은 끝났지만 한러란은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없었다. ‘예술적으로 풍경화만 그릴 수 있고 고생하는 대중은 그릴 수 없다’는 국민당의 명령 때문이었다. 한러란은 하는 수 없이 제자 황주(黃胄)를 데리고 화산(華山)을 향해 사생(寫生)의 길을 떠났다. 

1943년부터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러란은 서북지역을 떠난 적이 없었다. 이 기간 그는 둔황(敦煌)벽화를 모사했고, 옛 고창국(高昌國) 유적지의 유물유적과 바이청(拜城) 커쯔얼 천불동(千佛洞) 유적을 연구했다. 또한 간쑤(甘肅)·칭하이(靑海)·신장(新疆) 등지에서 유화와 수채화를 그렸고, 예술가 신분으로 통일전선 업무에 참여하여 국민당 허시(河西)경비구 총사령 타오즈웨(陶峙嶽) 등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이 시기 한러란은 소묘·스케치·유화·수채화 등 다수 작품을 완성했고, 서북 고고학 분야에서도 풍성한 성과를 남겼다. 이 밖에도 대서북(大西北) 해방, 특히 신장의 평화로운 해방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는 그가 생애 마지막에 남긴 최고의 업적으로 손꼽힌다. 

서북지역 각 민족들의 노동과 풍속은 한러란의 현존 유화 및 수채화 작품들의 최대 테마이며, 그는 이를 테마로 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대서북 지역으로 불리는 간쑤·칭하이·신장은 다양한 소수민족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다. 유배생활을 했던 한러란은 예리한 시선으로 더욱 민감하게 그곳의 새로운 장면을 포착했고, 사진을 찍듯 당시 그곳 소수민족들의 노동장면과 일상생활, 종교, 문화 등등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라부렁거리(拉卜楞街市圖頁) 1945년 사진/중국미술관 제공

또한 한러란은 허시회랑(河西走廊)지역의 농민들이 땅을 일구고 물을 끌어오는 장면, 일을 나가는 모습 등을 작품으로 남겼고 바오톈(寶天) 철도, 톈란(天蘭) 철도를 부설하는 노동자들의 시공현장을 그린 작품도 완성했다. 그림 속 노동자들은 햇빛 아래에서 상의를 벗고있거나 낡은 옷차림을 한 모습이다. 이를 통해 서북 고원의 분주하고 숨가쁜 삶을 느낄 수 있다. 
 
한러란은 이들 서북지역 주민들의 모습을 진실되게 그렸고, 그들의 노고를 기록했으며, 자신이 꿈꾸는 평화로운 삶도 화폭에 담았다. 사실 신체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 아카데믹 화가들에게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내용이지만, 바로 이 점은 예술사에서 한러란만의 특별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글| 저우진(周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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