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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빈, 연필 끝에서 솟아오르는 아시아의 용


인민화보

2018-01-29      인민화보

박소빈 화가 사진/궈사사(郭莎莎)

, 예로부터 용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화신(化身)’으로 여겨져 왔다. 용에 얽힌 무수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용과 관련된 문화는 어디에서나 눈에 띈다. 사람들은 이처럼 신성(神性) 가득한 용의 존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문자로 기록했고, 건축에 용의 모습을 새겨 넣거나 애니메이션을 통해 용의 총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런데 여기 가장 소박하고, 가장 기본적인 수법으로 용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를 풀어내는 명의 한국 화가가 있다. 주인공은 바로 박소빈 화가다. 그녀는 한국 화가로는 최초로 베이징 진르(今日)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9 23일에서 10 29일까지 베이징 진르미술관에서 <화룡(化龍), 무한(無限)> 주제로 박소빈 화가의 초대전이 열렸다사진은 화가의 작품

수박밭의 꼬마 화가

화가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몹시 좋아했다. 그것도 여타 취미에 비해 그림만큼은 거의중독 가까운 수준이었다.


한번은 가족이 소풍을 적이 있어요. 아빠가 저를 수박밭에 데려 가셨죠. 옆에는 초가집이 있었고요. 낮에 잠깐 쉬는 동안 저는 초가집으로 가서 아빠를 찾았죠. 그때 아빠가여기까지 왔으니 그림을 한번 그려보라 하셨어요. 그때는 초가집 안에 있으면서도 초가집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어요. 그래서 그냥 느낌에 따라 그림을 그렸죠. 아빠도 옆에서한번 마음 가는 대로 그려보라 응원해 주셨어요. 그렇게 우리는수박밭의 초가집이라는 작품을 완성했죠. 그때 아빠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정경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어린 화가가 자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아빠는 딸이 정말로 그림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를 어린이 미술학원에 보냈다. “그때부터 미술학원에서 쉬지 않고 그림 공부를 했어요. 지겹다는 생각은 한번도 적이 없어요. 가족들과 선생님들도 그렸다면서 저를 격려해 주셨고요. 그림은 아주 자유로운 예술인 같아요.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니까요.


음악에는 악보와 리듬이 있잖아요. 수공예도 배합되는 재료에 맞춰 순서에 따라 진행해야 하고요. 어쩌면 이렇게 자유롭기 때문에 그림에 흥미를 보였던 것이 아닐까요.” 화가의 말이다.


아빠는 그림을 배운 적이 없지만 화가의 기억에 아빠는 그림에 매우 정통한 분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저를 데리고 영화나 연극, 전시회를 자주 보러 다니셨어요. 제가 그림을 그리면 무척 좋아하셨죠.” 과거를 회상하는 화가의 속에 행복이 넘쳐 흘렀다.


박소빈(朴素贇)이라는 이름도 아빠가 직접 지어주셨다. 중에서 글월 (), 무예 (), 조개 () 합쳐진()’이라는 글자는 한국인들에게 낯설 뿐더러 이름으로도 쓰지 않는 글자다. 화가는 본인 이름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아빠는 한자를 많이 알고 계셨어요. 동네 아이들 이름도 아빠가 지어주셨죠. 이름을 지어주실 때도 엄청 고민을 많이 하셨대요. 딸이 박학다식하면서 힘도 세고, 재물도 갖기를 원하셨어요. 사실 아빠는 사람이 아는 있으면 돈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셨죠.”


화가가 여태껏 그림을 공부한 과정을 들어보면 누가 시켰다거나 싫은데 억지로 연습했다는 내용이 하나도 없다. 그림은 항상 삶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와 함께 했다. 예고 입학을 결정할 시기에 이르자, 사춘기를 겪던 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예고에 진학하면 분명 대학에서도 예술을 전공할 것이고, 졸업 후에 예술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게 터였다. “(선택의) 범위가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셨죠. ‘자신의 선택을 믿어라. 그렇게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과 맞으니, 우리 딸은 분명 해낼 거라 믿는다라고요. 이제까지 가는 길마다 아빠가 보내주신 기대와 격려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어요. 아빠에게 정말로 마음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예술계에는 여러 이유로 여성 예술가의 수가 남성보다 훨씬 적다.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아빠는 그녀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아빠는 제가 여자아이라고 해서 저를 속에 가두려 하시지 않았어요. 항상 딸은 그냥 박소빈일 뿐이다. 딸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할 때도 그랬어요. 저에게 한번 해보라고 조언하셨죠. 해보지도 않고 된다는 어떻게 아냐면서요. 그래서 저는 오롯이 스스로의 삶을 있었습니다.”


1989 그녀는 국립목포대학교 예술과에 입학했다. 입학 때부터 그녀는 동기들을 뛰어넘는 자신감과 창작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제가 예고를 졸업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던 거겠죠. 대학에서는 전시회나 서적을 통해 세계 각지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예술을 더욱 체계적으로 배울 있었어요. 교수님들도 항상 저희에게 작품활동을 많이 하라고 권하셨고, 과감히 창작을 하라고 하셨죠. 덕분에 대학생활을 무척 알차게 보냈던 같아요.”


 화가는 소탈한 연필 드로잉으로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풀어낸다전시 기간 화가의 대형 작품도 동시에 완성됐다.


용의 기원을 찾아

1995 조선대학교 대학원을 다니던 화가는 처음 중국땅을 밟았다. “논문 제목이 <중국과 한국의 용등(龍騰) 조형예술 연구>였거든요. 지도교수님이 제목을 보시자마자 중국에 가서 연구를 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길로 비행기표를 사서 선양(瀋陽)으로 날아갔죠. 당시 옌지(延吉) 마을에 들렀다 다시 베이징(北京)으로 갔던 기억이 나요.”


짧은 중국여행이었지만 인상은 매우 선명하게 남았다. 그때까지 그녀의 모든 공부와 일상은 한국에서만 이뤄졌었다. 한국에서 무척이나 자유롭고 편안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해 왔고, 해외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은 번도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번의 중국 방문이 그녀의 생각에 작은 변화를 일으켰다. “용은 동양문화의 화신이잖아요. 자연히 용의 발상지(중국) 가서 연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해야 더욱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연구 결과를 얻을 있을 테니까요. 그때는 중국에 와서 공부할 기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어요.”


2009 화가는 뉴욕 첼시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첼시갤러리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 작가가 주제로 개최한 전시회였다. 상징적 의미로 가득한 용의 모습은 수많은 외국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화가는 연필로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풀어냈고, 선을 통해 동양 소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해외 관람객들은 한국의 화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화가의 부친이 광주미술관 관장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전시회가 끝난 화가는 곧바로부시윅 오픈 스튜디오(Bushwick Open Studio)’ 레지던시(입주작가) 프로그램에 합류하며 공식적으로 외국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인터넷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아서 한국하고는 이메일로밖에 연락이 됐어요. 다행히 전시회 반응이 좋아서 전시 기간이 계속 연장됐지요.”


낮에는 바쁜 전시활동에 생각을 겨를이 없었지만, 밤이 되고 주변이 고요해지면 홀로 숙소로 돌아와 멀리 한국에 있는 부모님 생각에 잠기곤 했다. “종종 지붕 위에 올라가 공항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구만리 밖에 있는 한국을 그리곤 했죠. 그러다 보면 어느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나왔어요.” 겉으로는 강인해 보이는 그녀지만, 속으로는 한없이 소녀 같은 연약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화가는 1 반이 지나 뉴욕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7개월 다시 광주미술관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차 베이징을 방문했다. 미국에 비하면 중국은 비행거리가 2시간도 되기 때문인지 몹시도 가깝게 느껴졌다. “아시잖아요,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사람들은 하나 같이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인걸. 그래서인지 금세 심리적으로 거리가 좁혀지는 기분이었죠. 사실 가려고만 하면 언제든 부모님 곁으로 수야 있었어요.


하지만 바로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기로 결정을 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오늘 진르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있었던 것도 여러 가지 원인과 결과가 맞아 떨어져서인 같아요. 중국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여기 계속 머물기로 결정했고, 덕분에 다양하게 교류할 기회를 얻게 되었죠. 그런 기회가 하나씩 쌓일 때마다 여러 평론가들을 알게 됐고, 분들의 추천 덕에 이곳에서 개인전을 여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으니 말이죠.”


작품 드로잉을 하며  자루의 연필을 썼는지 화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화가의 손은 오랜 작업 탓에 단단히 굳은 살이 박혔다사진/궈사사(郭莎莎)


드넓은 초원의 여백

그녀의 중국 유학생활은 그야말로고기가 물을 만난 이었다. “저는 베이징이 좋아요. 여기에는 오래된 전통 문화가 있고, 현대적이고 세련된 건축도 있거든요. 자금성이나 베이징 뒷골목(胡同) 걸을 때면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느낌이 들어요. 반면 싼리툰(三里屯)이나 궈마오 중심업무지구(國貿·CBD) 지날 때는 새로운 시대의 활력을 여실히 느낄 있죠.”


중국에서 지도 어느 8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이 2012년과 2014 베이징 포스갤러리(富思畫廊)에서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2016 상하이 히말라야뮤지엄과 광주시립미술관이이무기의 (螭夢)’ 주제로 공동 주최한 전시회에도 참가했다. 밖에도 광주, 서울, 뉴욕에서 잇따라 11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중국에서는 수많은 주요 단체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2009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 젊은 예술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지난 9 23일에서 10 29, 베이징 진르미술관에서 <화룡(化龍), 무한(無限)> 주제로 그녀의 개인전이 열렸다. 진르미술관은전위적 풍격과 남다른 비범함, 산업시대의 흔적과 현대적 사상이 결합된 독특한 미학적 품격으로도 알려져 있다. 유명 건축디자이너 왕후이(王暉) 설계한 갤러리 공간은 현대 예술로 하여금 무한한 가능성을 펼치게 한다.


사실 중국에서 예술 교류를 하거나 유학, 창작활동을 한국 예술가들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진르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한국인은 박소빈 씨가 처음이다. 화가는 이를 무한한 행운과 영광으로 여긴다. 작년 진르미술관 전시기획자가 그녀에게 연락을 이후 올해 9 전시회 오픈 때까지 꼬박 1 동안 다른 전시회 기회를 모두 거절한 오로지 이번 개인전에만 매달렸다.


화가는 전시 기간 내내 관람객과 언론 매체를 맞이하는 틈틈이 20m, 높이 3m 달하는 거대 그림을 완성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당시에는 이미 마무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화폭 아래 지면에는 흑연가루가 소복이 쌓였고, 화가의 손은 오랜 작업 탓에 굳은 살이 도톰히 박혀 있었다. 그녀에게서 예술과 창작에 대한 애정을 느낄 있었다. 그것은 그녀를 가까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염되고 마는 하나의 신념이자, 내면의 열정이기도 했다.


전시기획자이자 평론가, 진르미술관 학술디렉터이기도 황두(黃篤) 쓰촨(四川)미술대학 중국예술사회연구소 연구원 미술학과 교수는 화가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반적으로 현대 예술에서 화가가 스케치로 개인전을 여는 것은 상당히모험적 일이라 있습니다. 스케치 같은 매개물은 정통예술 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스케치는 보통 화가의 전체 창작구상에서 친필 원고나 소재에서 중요한 모티브 역할을 뿐입니다. 하지만 화가는 스케치와 창작을 분리하지 않고 둘을 하나의 유기적인 예술체로 인식했습니다. 스케치를 현대 예술의 표현매개를 넘어 자신의 예술 철학을 재현하는 방법으로 삼은 것이죠.”


필자가 보기에 화가의 그림은 몽환적이면서도 신화적 색채가 가득하다. 여성의 매혹적인 감수성마저 흐른다. 이처럼 신비로운 기운은 그녀만의 독특한 화법에서 유래한다. 연필 끝에서 상상력 넘치고 차분하면서도 동적인 흑백 톤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과거의 신화를 연극적 요소가 가득한 시각적 서사로 풀어내고, 언뜻 어수선해 보일 있는 선들을 조화롭고 질서를 갖춘 회화 패턴으로 정리한다. 정적인 동적이고,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으며, 고전과 유행 사이에서 회화로서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녀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회화기법과 언어적 논리, 서사적 미학이 담겨 있으며, 예술적 화법을 자신만의 언어로 재구성하고 안에 의미를 새롭게 부여한다.


진르미술관의 가오펑(高鵬) 관장도 화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가오 관장은 화가는 새로운 회화적 언어를 모색하는 한편, 아시아의 신화와 현대 페미니즘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창출하려 한다. 그녀는 화필을 통해 전통신화 영수(靈獸), 사랑, 관계 따위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은근하게 아시아의 차세대 현대 여류예술가로서참신한 풍모를 드러내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화가는 창작 영감을 얻기 위해 중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다녔다. 중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지역은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다. “네이멍구 초원에 담긴 여백의 화면이 좋아요. 드넓고, 조용하고, 무한한 상상의 여지를 주죠. 안에 있으면 자신이 무척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고, 동시에 천지자연과 하나가 느낌을 받아요. 여유가 있을 1년에도 번씩 네이멍구 초원에 가서 멍하니 지내거나 말을 타곤 하죠. 자유롭게 말이에요.”



글|왕자인(王佳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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