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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톈진기기국에 파견된 조선영선사


인민화보

2017-06-23      인민화보

톈진기기국


청나라의 톈진기기국(天津機器局)은 본래 삼구통상대신(三口通商大臣) 숭후(崇厚) 등이 1867년 설립하여 운영했다. 그 후 리훙장(李鴻章)이 총독을 맡고 공장을 인수한 뒤 여러 해에 걸친 노력을 통해 당대 최신 설비와 상당 규모를 갖춘 근대식 군수공장으로 거듭났다.


청나라가 잇따라 근대화 시도에 성공하자 이웃나라인 조선도 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느낀 고종은 보수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청나라 조정에 조선인들의 기술유학을 청했고, 리훙장도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881년 말 김윤식(金允植)을 필두로 69명의 기술유학생들로 구성된 조선의 영선사(領選使)가 머나먼 여정을 거쳐 톈진기기국에 도착했다. 청 조정은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상세한 교육 일정을 안배했다. 양측은 모두 미래에 대한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유학생들은 톈진기기국의 동국(東局)과 서국(西局) 각 부문에 배치되어 기술을 배웠다. 동국과 서국은 현재 톈진 둥쥐즈(東局子)와 하이광쓰(海光寺) 인근이다. 김윤식은 이들의 학습 현황과 유학 생활을 살피면서기기국의 규율을 엄수하고 국방력 건설에 힘쓰되 이국 땅에서 말썽을 일으키지 말라”고 늘 강조했다.


기기국 총서(總署)도 유학생들을 감독하며 성심껏 지도했다. 당시 서국총판(西局總辦) 왕덕균(王德均)은 조선 유학생들을 높이 평가했다. 전기창(電機廠)의 안준(安浚), 상운(尙澐) 등에 대해서는스스로 만들어보고 실험해보며 실수가 적다”고 칭찬했다. 화도창(畫圖廠)의 안욱상(安昱相)머리가 비상하여 점차 청나라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평가했고, 조태원(趙台源)에 대해선기구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였다”고 평했다.


반면 동국(東局)의 유학생들은 줄곧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젖어 있었고 일부는 중도 귀국하기도 했다. 동국 총판 반준덕은 이들이항심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이들은 유학생활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어려운 기술을 배우려니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이 절로 솟았다. 유학생들은 난생 처음 타국을 밟은 이들이 많았고 먼 길을 이동해 온 데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도 어려웠다. 이 때문에 영선사가 톈진에 도착하자마자 일곱 명이 병으로 앓아 눕기도 했다. 그 가운데 홍만길(洪萬吉)은 근대 조선 유학생으로는 처음으로 중국땅에서 객사하기까지 했다.


당시 조선 사회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관념이 전근대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기술을 습득한 장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높지 않았고, 아무리 성과를 내도 당시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오른 문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학생 대부분은 기술 학습에 대한 열정이 높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청나라의 언어 습득에만 열을 올렸다. 또 대다수의 유학생들은 서른 살을 넘긴 경우가 많아 언어든 기술이든 새로운 것을 배우기 좋은 나이도 이미 지난 터였다. 궁핍한 재정도 유학생들을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김윤식은 자신의 일기에서이리저리 돈 드는 곳 투성이라 빚을 내 생계를 꾸릴 때도 있었다”고 적었다.


이같은 상황을 지켜본 김윤식은 리훙장에게 한 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지금처럼 조선에서 유학생을 파견되는 방식 대신, 중국의 기술장인을 조선으로 모셔 기술을 전수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리훙장도 이해를 표했다. 그러나 한창 계획을 논의하던 찰나, 조선의 내부 정치상황이 급변하며 결국 1882 7 23일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전란 소식이 전해지자 톈진에 머물던 조선 유학생들은 시종일관 불안한 마음으로 고향을 걱정했고, 자연히 더는 유학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882년 영선사 모두가 조선으로 귀국하며 수많은 과학서적과 기기모형 및 설계도를 갖고 들어왔다. 이후 김윤식 등은 중국 기술자인 원영찬(袁榮燦)을 초빙하고 각종 기기를 사들여 서울 삼청동에 조선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병기공장인기기창(機器廠)’을 건립했다. 또 청 말기에 세워진 외국어 전문학교 경사동문관(京師同文館)을 모방해동문학(同文學)’을 세우고 조선의 외국어 교육 분야를 개척했다.


비록 영선사는 양국 정부가 최초에 기대했던 바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서양기술을 배운다는 의지와 생각은 이후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 깊은 흔적과 의미를 남겼다.



글|왕멍(王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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