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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거이(白居易)-끝없는 그리움(長相思)


인민화보

2017-02-15      인민화보

 

汴水流,泗水流,流到瓜州古渡頭。吳山點點愁。

思悠悠,恨悠悠,恨到歸時方始休。月明人倚樓。

Biànshuǐ liú, Sìshuǐ liú, liúdào Guāzhōu gǔdùtóu.

Wúshān diǎndiǎn chóu.

Sī yōuyōu, hèn yōuyōu, hèndào guīshí fāngshǐxiū. Yuèmíng rén yǐlóu.

변수의 흐름, 사수의 흐름, 흘러흘러 과주의 나루터. 멀리 강남의 산들이 시름겨워라.

하염없는 그리움, 끝없는 한이여, 그대가 돌아와야 그치리. 밝은 아래 누각에 기대어 있네.

 

백거이(AD 772-846) 일찍부터 그의 () ‘백낙천(樂天)’으로 통했다. 그만큼 친숙하다는 뜻이리라. 조선시대 선비들에게 백거이는 이백, 두보 이상의 매력적인 대시인이었다. <끝없는 그리움>이란 원래 멜로디의 제목, 사패(詞牌)이지만 내용과도 맞아떨어진다. 전에 소개한 있는 백거이의 <강남의 추억(憶江南)>처럼 역시 한시(근체시) 아니라 통속적 노래가사에서 유래한 ‘사()’로써, 같은 멜로디에 다른 글자들을 얹거나 다른 시인의 작품을 붙여 노래할 있었다. 여러 시인의 <長相思(장상사)> 있으므로 중국인들에게 작품을 정확히 지칭하려면 ‘白居易 長相思, 汴水流(백거이 장상사 변수류)’라 하는 좋겠다.

 

백거이의 고향은 하남(河南)성의 고도 낙양(洛陽) 부근의 신정(新鄭)이다. 대륙의 서북쪽 산서(山西) 태원(太原) 본적인 청렴한 선비관료 집안 출신으로, 이백 사후 10, 두보가 죽은 2 후에 태어났다. 당나라 3 시인으로 꼽히며 시대의 한유(韓愈) 더불어 ‘이두한백(李杜韓白)’으로 불린다. 중국문학사 전체를 털어 일류문인 인지라 한중일에 두루 팬이 많다. 29 과거 급제, 807년에 한림학사, 3 좌습유(左拾遺) 되는 문관 고위직을 지낸 정통 유가 문인이자 유교적 문학관을 보여주는 작품을 다수 남긴 시인이나, 젊은 시절엔 낭만적 기질이 돋보였고 나이 들면서는 불교에 기울어진다.

 

이렇듯 자체가 다채로운 백거이는 풍부한 서정성과 비판정신을 담은 걸작들이 많다.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 <장한가(長恨歌)> 있는가 하면, <신풍절비옹(新豊折臂翁)>에선 백성들의 고통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동정을 보여준다. 두보의 대표작 <병거행(兵車行)> 비교되곤 하는 작품은 젊은 시절 전쟁터에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깊은 남몰래 자신의 팔을 돌로 내리쳐 쓰게 만들었다는 88 노인의 비극적 체험을 전한다. <매탄옹(賣炭翁)> 역시 힘겹게 살아가는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탐관오리들을 향한 분노를 담고 있다. 작품이 속한 <신악부(新樂府> 50수는 유교적 문학관을 보여주는 성취들로서 문학사적 가치가 높다. 황제에게 여러 차례의 직언, 풍자적인 시편 등으로 조정권신들의 미움을 끝에 좌천된 후에 <비파행(琵琶行)> 또한 빼놓을 없다. 떠돌이 가녀(歌女) 인생에 시인의 삶을 투사한 명작이다.

 

중앙으로 복귀하지만 권세다툼을 일삼는 사람들에 지쳐 이번엔 자진해 지방관리로 나간다. 822 그렇게 내려간 곳이 유명한 항주(杭州)였고 3 소주(蘇州) 가게 된다. <끝없는 그리움> 강남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울분과 비애를 삭이던 시절, 애타게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처지에 자신의 심정을 이입한 작품이다. 汴水(변수) 泗水(사수) 각각 하남(河南) 산동(山東)성에서 발원해 안휘(安徽)성에서 합류한 다음 회하(淮河) 흘러드는 강물이다. 瓜州(과주) 강소(江蘇) 소재 교통과 물류의 요지였던 양주(揚州) 남녘의 나루터였다. 인간사 수많은 사연을 실은 면면히 도도히 흐르는 강물은 하염없는 그리움과 가없는 슬픔의 절묘한 비유이자 은유가 아닐 없다. 옛날 () () 경합했던 오나라 땅이 바로 강남이니 오산(吳山)이란 강남의 산들, 바로 항주 소주의 주위 경관에 해당한다. ‘吳山點點愁 月明人倚樓’엔 근체시 수준의 함축성과 격조가 드러나지만 전체적으로 평이한 구어체다. 평민 하층민들에게까지 애송되던 시인답다. 요즘으로 치자면, ‘문단의 거두인 동시에 통속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뽕짝의 작사가’쯤 되려나. 모름지기 진정한 대중성이란 이런 아닌지.

 

다시 중앙으로 불려가지만 정치판의 현실에 질려 낙양에 은거,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 향산사 스님들과 교류하며 시에 정열을 쏟는다. 5 시를 짓기 시작해 15살쯤엔 주위를 놀라게 하고 16 과거시험을 치르러 장안에 당대의 명사들에게 시재를 인정받았던 백거이, 천재성에 한층 깊이를 더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58 이후, 시와 술과 거문고를 벗삼아 ‘취음(醉吟)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한다. 842 71세로 퇴직할 당시 이미 문집70, 시문창작의 편의를 위해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이 있었다. 퇴직 <백씨문집> 75권을 스스로 깔끔히 편집하고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그야말로 시대의 종언이었다. 낭만성, 비판정신, 리얼리즘이 녹아 있는 그의 삶과 시세계는 이백과 두보의 매력을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아속(雅俗) 넘나들며, 자신의 문집을 완전히 정리함으로써 생애를 마무리한 백거이는 모든 글쟁이들에게 경애와 선망의 대상이 아닐 없다.

임명신(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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