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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부스(程不時), ‘나와 비행기의 시간’


2017-06-30      글|양윈첸(楊雲倩)

()중국 1세대 항공기 설계사 청부스 사진/라이신린(賴鑫琳)

 

지난 5 5일 오후. C919’의 시범 비행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인파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은 벅찬 감정을 느끼며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국 항공발전은 ‘중궈멍(中國夢, 중국꿈)’의 중요한 부분이다.‘윈()-10’부터 쌓은 경험과 조직이 있었기에 오늘날 강대한 힘을 가진 C919를 만나게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겠지만 우리의 자신감은 날로 커질 것이다.

 

지팡이를 짚고 선 노인의 말은 현장에 있던 사람들을 감동시켰을 뿐 아니라 모두를 멀지 않은 과거로 되돌려 놓았다. -10의 날들과 신()중국 60여 년의 항공산업 발전의 시간이 눈앞에 재현되었다. 1951년 항공공업국(航空工業局) 설립 이후 지금 C919의 처녀비행이 있기까지, 청부스의 시간은 신중국 항공역사 그 자체였다.


유년시절부터 키운‘항공과학자의 꿈’

중국의 원로 항공과학자 청부스는 1930년 후난(湖南)성 리링(醴陵)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독일 유학 후 귀국한 기계 엔지니어였고, 모친은 초등학교 교사와 교장을 역임했다. 청부스는 부모를 따라 우한(武漢)·난징(南京)·지난(濟南)·구이린(桂林) 등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보냈다.


“구이린에서 초등학교 3학년을 다녔는데, 그때는 마침 항일전쟁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당시 나는 ‘플라잉 타이거즈 (Flying Tigers, 飛虎隊)’와 일본 비행기가 공중에서 싸우는 것을 보고서 매우 놀랐었다.” 당시 구이린은 중국의 항일전쟁 지원에 나선 미국 ‘플라잉 타이거즈’의 연합공군기지였다. 청부스는 공습경보가 울리면 학교 선생님, 시민들과 함께 리장(漓江) 건너편에 있던 치싱옌(七星巖) 동굴로 숨었다. 끊이지 않았던 전투기 폭격 소리에 공포심을 가질 법도 했지만 훗날의 청부스는 비행기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된다. “내가 정말로 멋진 비행기를 만들어서 일본인들을 쫓아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1930-40년대 세계 정세가 변화무쌍하게 돌아가고 있는 가운데 과학기술은 전대미문의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항공영역이 그러했다. ‘항공구국(航空救國)’ 외침에 발맞춰 1938년 칭화(淸華)대학교에는 중국 최초의 항공공정과(칭화대 항공공정과는 1950년대 베이징항공학원 설립의 전신이 되었으며, 베이징항공학원은 훗날 베이징항공우주대학으로 개명했다)가 설립됐다. 칭화대는 첸쉐선(錢學森)·선위안(沈元)·루스자(陸士嘉)·왕더룽(王德榮)·구페이무(顧培慕) 등 유명 교수를 임용했다. 1947년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청부스는 전국의 명문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실력이었음에도 꿋꿋이 칭화대학의 항공공정과를 선택했다. 조국을 위해 비행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창장(長江상공의 청부스와 ‘윈-10’ 시범비행 기장 왕진다(王金大)


중국산 제트 여객기를 만들다

1951 4월 항공공업국의 설립으로 신중국 항공산업이 탄생했고, 3개월 뒤 졸업한 청부스는 신중국 사상 처음으로 항공산업으로 배치된 대학생이 되었다. 당시 신중국에서는 여러 가지 일이 추진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항공산업은 맹아기에 놓여있었다. 청부스는 소련 전문가들과 함께 ‘항공산업 6대 공장(선양 비행기 제조공장·선양 항공엔진 제조공장·하얼빈 비행기 제조공장·하얼빈 엔진공장·난창 비행기 제조공장 등)’ 건설에 참여했다. 공장건설 설계부터 시작한 그는 그렇게 한걸음씩 꿈꿔 오던 비행기 설계에 다가갔다.


1949년 최초의 민용 제트 여객기가 영국에서 처녀비행에 성공했다. 제트엔진의 탄생은 더 빠르고 더 높은 비행을 원하던 인류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충분한 동력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또한 세계 항공사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1 비행기 설계실’ 주임을 맡았던 쉬순서우(徐舜壽)는 “더 많은 비행기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또 신중국만의 항공기 설계팀을 구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트식 교련기를 개발하기로 했다. 내부 회의를 거쳐 이름을 ‘젠자오(殲教)-1’로 확정했다”고 회고했다.


신중국 최초의 비행기 설계는 ‘제트식’에 중점을 뒀다. 26세의 청부스가 얼마나 부담감을 느꼈을지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청부스는 모든 시간을 비행기 설계에 쏟아 부었다. 다방면으로 관련 자료를 수집했고, 각국의 전투기 조종사 훈련시스템을 연구했으며, 수많은 설계 초안을 그렸으며 무수한 기술 테스트를 진행했다. 청부스의 설계는 앞서 소련 비행기를 모방했던 주류사상에 비해 매우 독창적이었다. 2년 여의 시간 동안 설계팀은 젠자오-1 설계방안을 토대로 풍동실험, 구조 안정성 테스트 등 수 많은 테스트를 수행했다.


1956년 ‘제1 비행기 설계실’ 총괄설계팀 팀장을 맡게 된 뒤에는 젠자오-1 설계를 하느라 침식마저 잊었다.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1958 7월 마침내 젠자오-1이 처녀비행에 성공했다. 젠자오-1은 중국이 독자적으로 설계하고 제조한 최초의 제트식 항공기로서, 중국이 본격적으로 제트시대에 진입했음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건국 초기의 신중국은 항공기 관련 산업에서 소련 전문가들의 도움에 의지했었다. 처음에는 수리만 하던 중국은 점차 모방 제조 단계로 들어섰고, 마침내는 자체 설계에까지 뛰어들기 시작했다. 수리에서 모방, 모방에서 자체 설계라는 단계 변화를 이루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7-8년에 불과했다. 젠자오-1이 첫 비행에 성공한 그 해, 청부스가 설계한 초음속 폭격기 ‘창()-5’ 또한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1958년 등장한 중국 최초의 독자개발 제트 여객기 ‘젠자오-1’과 28세의 청부스(오른쪽 세번째)


1980 9 26일 ‘윈()-10’이 첫 비행에 성공했다.


1981 12 8일 ‘윈-10’이 베이징 공군 난위안(南苑)공항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


포기할 수 없던 대형 여객기

항공산업은 그 역사가 100여 년이 채 안 되는 신흥산업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등장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싣고 먼 거리를 운행하는 대형 여객기가 탄생하기까지 세계 항공기술은 지난 100년간 ‘제트식’과 ‘대형화’ 라는 양대 획기적 발전을 이루었다. 중국의 항공산업 역시 비슷한 노선을 걸었다. 중국 항공산업이 제트식·대형화의 양대 발전을 실현하는 과정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청부스다.


업계에서 말하는 대형 여객기란 100t 이상의 화물적재능력이나 150석 이상의 좌석을 갖춘 간선 여객기를 가리킨다. 대형 여객기 제조능력 보유 여부는 그 나라의 민용 항공산업, 나아가 산업 전반의 수준을 보여주는 기준 중 하나다. 1955년 미국 보잉사는 대형 제트여객기 ‘보잉 707’을 출시하며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고, 같은 해 소련의 중거리 제트여객기 ‘투폴레프 (Tu)-104’는 첫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1969년 영국·프랑스·독일 등 유럽 각국들은 공동으로 보잉과 경쟁할 대형 여객기 ‘에어버스’를 선보였다.


1970 8월 국가 명령에 따라 ‘708(1970 8) 프로젝트’가 상하이(上海)에서 정식으로 시작됐다. 코드번호는 윈-10. 이에 따라 전국 각지 40여 개 사업체에 소속되어 있던 과학분야 연구인력 300여 명이 상하이로 파견되었다. 1970년 청부스 역시 아내 허야시(賀亞兮)와 함께 상하이로 배치되었다. 청부스는 프로젝트 총괄 설계팀 부팀장을 맡았다가 비행기 부총괄 설계사가 되었으며, 허야시는 상하이 비행기설계소 엔지니어로서 소재 관련 업무에 참여했다.


1970년대는 근무환경이나 생활조건이 모두 열악하던 때였다. 협소한 사무실에서 연구원들은 냉장고를 책상 삼아 일했고, 때로는 식당에서 도안을 설계하거나 공항터미널에서 일을 처리하기도 했다. 상하이의 여름은 모기 같은 벌레들이 특히 기승을 부리는 때다. 모기를 피하느라 신문으로 팔다리를 감싸고 일하면서 땀 범벅이 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업무 분위기는 좋았고, 청부스 팀이 개발하고 운용한 방법 및 기술은 언제나 세계 일류 수준이었다.


당시 업무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중국의 비행기 설계 사상 처음으로 윈-10 개발에 컴퓨터 작업을 도입한 것이었다. 설계팀은 퇴근 이후의 시간을 활용해 상하이과기대학교의 컴퓨터 한대로 138개의 프로그램 테스트를 진행했다. 이 밖에도 윈-10은 새로운 설계방법·규칙·기술·소재·부품들을 채택했고, 때문에 난이도가 높은 어려움들을 극복해야 했다.


1980 9 26일 윈-10이 상하이 공항 하늘을 가르자 현장에 있던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륙중량 110t, 최대속도 마하 0.8, 고도제한 12000m, 최대 비행거리 8000km 이상이었다. 미국·소련·유럽의 선진 기술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중국은 마침내 독자 기술의 제트식 여객기를 갖게 되었다. 시범비행에 참가한 조종사 왕진다(王金大)는 착륙 후 “몸집이 큰 사람이 농구를 하는 데 그 몸놀림은 매우 재빠르다”며 윈-10 시범조종 소감을 밝혔다.


이후 윈-10은 베이징·하얼빈·우루무치(烏魯木齊)·라싸(拉薩)·광저우(廣州)·청두(成都)·쿤밍(昆明) 등지를 순회비행하면서 단숨에 이착륙 130여회·누적 비행시간 170여 시간의 기록을 세웠다.


-10의 모델명 ‘708’이 보잉사의 707과 유사하다 이유로 당시 지적재산권 및 기술경쟁을 둘러싼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잉사 부회장은 윈-10을 본 뒤 미국의 우주·항공 전문매체 <에비에이션 위크(Aviation Week)>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윈-10은 보잉 707의 복제판이 아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10은 중국이 운수기 자체설계 능력을 발전시킨 10년 간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1982년부터 윈-10의 연구가 사실상 중단됐고, 청부스는 윈-12(정원 19인승의 경량 운수기) 연구개발(R&D)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1985 2월 윈-10의 비행이 중단된 데 이어 1986년 재정상의 이유로 3000만 위안의 R&D 예산이 부결되면서 윈-10 개발 프로젝트는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청부스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2002당시 72세인 청부스가 자신이 설계 총책임을 맡은 ‘추자오(初教)-6’에 서있다.


조국을 위한 항공기 사랑

수년간 청부스는 항공기에서 끊임 없는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의 꿈은 여전히 대형 여객기를 자체 개발하는 것이었다. “어떤 외국인이 말했다. 중국은 독수리지만 날개가 없는 독수리라고. 대형 여객기가 곧 날개다. 나는 중국 항공산업의 66년 발전사를 함께 했다. 소형 항공기·음속기 등 다양한 항공기를 설계했지만 가장 아쉬움이 남는 것은 대형 여객기를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은 중국만의 대형 항공기가 필요하다.” 

 

-10 프로젝트 폐지로 54000만 위안의 투자가 헛수고로 돌아갔다. 두 대의 윈-10 중 한 대는 분해되어 부품으로 쓰였고, 다른 한대는 상하이 다창(大場)공항에 서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윈-10 프로젝트 종결 후유증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중국은 보잉·에어버스의 대형 여객기를 구매할 수 밖에 없던 것이다. “지난 시간 동안 우리가 대형 여객기를 구매하는 데 쓴 돈이 하야트호텔 100채를 짓는 데 들어간 돈보다도 많을 것이다. C919 첫 비행 당일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남긴 청부스의 이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최근 수 년간 중국 민용 항공기 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형 여객기 R&D가 좌절되고 기술 면에서 간섭을 받는 일도 생기고 여러가지 난처한 장면도 빚어졌다. “국제항공회의에서는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외국인 사회자가 ‘지금부터 중국에서 오신 분들께서는 회의장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에 대해 토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하고 선언한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중국)는 대형 여객기의 ‘조립공장’에 불과했다.” 지난 일임에도 청부스는 여전히 애통해했다.


-10의 실패는 일련의 ‘나비효과’를 낳기도 했다. 중국 국산 대형 여객기 제조가 중단되자 심각한 인재유실 현상이 나타났고, 이는 대형 여객기에 대한 자신감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ARJ-21’ 신 지선 여객기 프로젝트 감독팀 팀원 류첸유(劉乾酉)는 이같은 부정적 영향을 실제로 경험했다. “수 십년 동안 항공기 연구가 중단되자 젊은이들이 모두 다른 업계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팀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1986년 정년보다 4년 일찍 은퇴한 청부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 독자 여객기 제조 기술 발전에 관한 글을 쓰거나, 상산(香山)과학회의·전국 경제계 토론회 등 행사에 참여하는데 할애했다. 때로는 ‘중국은 대형 여객기를 제조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해 그 필요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인터넷 블로그를 개설하고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글과 과학지식 보급을 위한 글을 게재했다. 또 윈-10에 대한 각계의 의문에 대해 직접 대답하는 등 대중과 항공 관련 지식에 대해 교류할 수 있는 채널로 블로그를 활용했다.


2007년에 이르러 중국 대형 항공기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입안되었다. 2008년 중국상용항공기(COMAC·코맥) 설립 이후 청부스는 전문가 자문팀 일원이 되어 대형 여객기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37년만에 보게 된 독자개발 대형 여객기 C919의 처녀비행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누군가는 청부스가 생전에 대형 여객기와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윈-10 연구가 계속되었다면 중국의 대형 여객기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경지에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물론, 청부스 그의 바람과 꿈도 더욱 일찌감치 실현되어 더 밝은 빛을 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부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난 30-40년은 중화민족이 발전 중에 반드시 겪어야 할 굴곡의 시간이었고, 충분한 대가와 진통을 치르고 나야 비로소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0 설계 프로젝트에 참여한 시간은 그의 인생 중 최고의 시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윈-10·대형 여객기에 빠져 지냈던 것은 중국 항공산업의 미래를 바꾸고 싶다는 그의 진실된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한번도 내 사익을 생각한 적이 없다. 오로지 국가만을 생각했다.

(미서명 사진은 청부스 제공)



글|양윈첸(楊雲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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